미군 폭격으로 가장이 목숨을 잃어 가세(家勢)가 급격히 기울었는가 하면 ‘제삿밥’ 차려줄 가족도 없이 훌쩍 떠난 이도 있었다.
강산이 6번이 바뀐 2010년, 먼저 떠난 이는 말이 없지만 그 후손에게서 남에게는 쉽게 말하지 못할 아린 아픔이 묻어났다.
1950년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아들 3명을 두었던 고 이용석 씨.
당시 55세였던 이씨는 판교초등학교(현 서천 사랑병원) 인근에 차려진 임시 장터에 큰 기와공장을 경영하고 있었다. 당시엔 제법 큰 규모의 공장이어서 남부럽지 않은 생활을 했다고 후손들은 전한다.
하지만, 그해 9월 1일 미군 전투기 폭격으로 이씨 집안형편은 180도 바뀌게 된다. 손자 이창우(59)씨는 “1차 폭격 때는 할아버지가 공장 안에 계셨는데 무슨 일인가 싶어 밖으로 나왔을 때 2차 폭격이 있었고 총탄에 맞았다고 들었다”고 전했다.
조부 사망 이후 이씨 집안은 기와공장을 다시 운영할 사람이 없어 형편이 급격히 어려워졌다고 한다.
▲ 사진 왼쪽부터 이창우, 나환석, 지왕병씨가 60년전 서천 판교 사건과 관련한 목격담과 증언을 하고 있다./서천=지영철 기자 ycji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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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부터 기왓장을 찍어내던 가마가 멈춰섰다. 이씨는 “기와공장을 접은 뒤 당시 32세였던 부친이 농사를 지으며 온갖 고생을 하면서 8남매를 어렵게 키웠다”고 회상했다.
고 지응용(당시 61세)씨는 '서천 판교' 사건 당시 허벅지에 파편이 박혔지만 다행히 목숨을 건졌다.
그러나 전쟁 통에 그것도 변변한 병원이 없는 농촌에서 제대로 된 치료를 받았을 리는 만무했다.
조카 손자 지왕병(51)씨는 “작은 할아버지가 부상을 입은 뒤 모친이 3년 동안 똥 오줌을 받아내면서 병 간호를 했지만, 상처가 악화돼 결국 숨을 거두셨다”고 폭격 후 비참한 생활상을 전했다.
지씨는 이어 “작은 할아버지는 당시 미혼이셨기 때문에 제사를 지낼 직계 가족을 남기지 못하셨다”며 “그 아픔을 조금이라도 풀어주기 위해 조부 제사 때 작은 할아버지 위패를 같이 모신다”고 말했다.
당시 폭격 피해 유가족들은 장례도 제대로 지내지 못했다고 한다.
목격자 나환석(79)씨는 “현장에서 죽은 사람들 가운데 가족이 있는 사람은 시신을 거뒀지만, 무연고인은 솔밭에 그대로 묻어뒀다”며 “그 시신이 1년이 지나도 같은 자리에 있는 경우도 있었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당시 낮에는 폭격 위험과 따가운 눈총 때문에 장례는 물론 묘를 쓰는 것까지 생각지도 못했고 밤에 몰래 했다”며 “아마도 유가족들의 한이 많이 맺혔을 것”이라고 딱한 사연을 전했다. /강제일·서천=나재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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