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천에 사는 김평순(81) 할아버지는 2일 미군 폭격이 있었던 판교면 판교리를 찾았다.
일주일에 서너 번은 오가는 곳이지만 이날은 감회가 새로웠다. '서천 판교'의 비극이 진실화해위원회로부터 진실규명 결정을 받았다는 사실이 본보 보도를 통해 알려진 뒤 처음으로 찾았기 때문이다.
▲ 60년전 한국전쟁당시 미군전투기의 폭격이 있었던 현재 서천군 판교면 판교리 '서천사랑병원' 인근 도로변에서 김평순씨가 당시 사건이 발생한 판교초 부근에서 열린 임시 장터의 상황을 증언하고 직접 목격한 폭격의 장면들을 기억해 내고 있다./서천=지영철 기자 ycji07@ |
서천에서도 시골인 판교지역은 온종일 오가는 사람을 찾기 어렵고 지나는 시내버스도 구경하기가 여간 힘든 것이 아닐 정도로 한적한 곳. 그래서인지 판교 폭격현장은 60년 전 참상을 고스란히 기억하고 있는 듯 더더욱 싸늘해 보였다.
잠시 과거를 회상하는 듯 하늘을 바라보던 김 할아버지는 “6·25 때 임시 장터가 있던 자리”라며 “차 2대가 지날 만한 신작로가 있었고 소나무가 우거지고 솔밭이 있었다”며 도로 뒤편에 있는 야산을 가리켰다.
야산 앞으로는 1920년대 개교한 옛 판교국민학교가 있었는데 지난 1995년 인근 오성초로 통폐합되면서 지금은 종적을 감췄다. 대신 그 자리에 한 병원이 들어서 있다.
김 할아버지는 “그때 신작로 양쪽으로 좌판을 펼친 노점상이 많이 들어섰다”며 “전쟁 통이지만 먹고살려고 상인들은 잘 익은 참외하고 갈치 등을 내다 팔았다”고 회상했다.
김 할아버지는 폭격 당시의 생생한 모습도 들려줬다.
▲ 60년전 한국전쟁 당시 파괴된 후 다시 복구된 판교초등학교 전경사진. |
그는 “인민군의 세발 오토바인가 하는 것이 후다닥 지나간 직후 바로 미군 전투기가 폭격을 했다”며 “잠시 뒤 장터를 바라보니 맨땅이지만 단단했던 도로가 호미로 긁은 것처럼 파헤쳐져 있었다”고 증언했다. 이어 “폭격이 끝나자 시신을 업어가는 사람들로 정신이 없었는데 지금은 사라졌지만, 판교에 있던 당시 동네의원 안이 시체를 누일 자리도 없을 정도였다”고 덧붙였다.
진실화해위원회 조사결과에 따르면 판교장은 5일장으로 판교면 소재지에서 개설됐으나 전쟁이 터지고 나서 당국은 폭격 피해 예방을 위해 면 소재지 장터 개설을 금지했다. 주민들은 할 수 없이 면 소재지에서 약 1~2㎞ 떨어진 현재의 서천 사랑병원 뒤편에 임시 장터를 개설해 생계를 이어갔다. /강제일 기자 kangjei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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