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민찬 대전대 교수 |
밤이면 마루 끝에 누워 달을 바라본다. 낮이면 문지방에 기대어 바람을 쐰다. 어디 그것뿐인가. 저 너머로 펼쳐진 강과 산은 아침저녁 언제든지 바라볼 수 있는 내 강이고 내 산이 아니던가. 달과 바람과 강과 산을 나의 소유라고 우기고 있어도 어느 것 하나 속된 구석이 없다. 그것이 ‘보름달’ 표 TV이거나 ‘청풍’ 브랜드의 에어컨이 되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소유한다고 해서 소유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1854년 백인 관리 아이삭 스티븐스가 시애틀의 퓨젓 사운드에 와서 땅을 사겠다고 했다. 그곳에 거주하는 인디언 원주민들을 보호구역을 만들어 격리하기 위해서였다. 그때 백인들 앞으로 시애틀 추장이 나서서 준엄한 연설을 토해냈다. 이 연설 내용은 백인이던 시애틀 추장의 한 친구가 30년이 지난 뒤 그곳의 지역 신문에 공개하여 알려지게 되었다. 그런데 그 글에서도 소유의 개념이 보이지 않는다.
“우리는 우리의 땅을 사겠다는 당신들의 제안에 대해 심사숙고할 것이다. 하지만 나의 부족은 물을 것이다. 얼굴 허연 추장이 사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그것은 우리로서는 무척 이해하기 힘든 일이다. 우리가 어떻게 공기를 사고팔 수 있단 말인가? 대지의 따뜻함을 어떻게 사고판다는 말인가? 우리로선 상상하기조차 어려운 일이다. 부드러운 공기와 재잘거리는 시냇물을 우리가 어떻게 소유할 수 있으며, 또한 소유하지도 않은 것을 어떻게 사고 팔 수 있단 말인가?”
앞의 시조에는 눈에 확 띄는 어휘가 하나 들어 있다. ‘경영’이다. 인문학을 전공하고 사회에 막 진출하려는 대학 졸업반 학생들에게는 조금은 불편하고 쓸쓸하게 들리는 말이 ‘경영’이다. 그런데 그 ‘경영’이 관리이자 문인으로 조선조 중엽을 살았던 면앙정 송순의 시조에 쓰이고 있다는 사실이 새롭게 다가온다. 여기서 ‘경영’은 다른 뜻이 아니다. 십 년 동안 애써 일하고 준비하여 마련한 끝에 세 칸짜리 초가집을 지었다는 말이다. 그렇게 해서 지은 집이 전라남도 담양군 제월면 망정 마을 뒷산에 있는 면앙정이다.
‘경영’이라고 하면 쉽게 기업 경영이나 조직 경영, 국가 경영 정도를 떠올린다. 그러나 그러한 것만이 경영은 아닐 것이다. 자기 자신에 대한 경영도 있을 수 있고 가족이나 가정에 대한 경영도 있을 수 있다. 어떤 면에서는 그처럼 가깝고 일상적인 경영이 더욱 중요할지도 모를 일이다. 자기 경영을 제대로 하지 못한 사람이 기업을 경영할 것이며 조직을 경영할 수 있겠는가. 가족이나 가정에 대한 경영을 도외시한 채 사회나 국가의 경영을 입에 올릴 수는 없는 일이다.
이처럼 ‘경영’에는 요즘의 취업시장에서 통용되는 좁은 뜻의 경영만이 있는 것이 아니다. 송순이 십 년을 경영했다고 하듯 애쓰고 준비하고 가꾸고 마련함으로써 목표에 이르도록 하는 것이 경영의 넓은 의미이다. 수신하고 제가하고 치국하고 평천하하는 것, 그 하나하나가 모두 경영이다. 달, 바람, 강산이 누구의 소유가 아니듯 경영이라는 말도 특정한 학문, 특정한 전공의 전유물은 아닌 것이다. 그런데 유감스러운 것은 요즘도 여전히 어느 한 분야의 ‘경영’만이 경영으로 인정을 받고 있다는 점이다. 취업을 위하여 기업의 문을 노크할 때 그 점은 특히 두드러진다.
취업시장 특히 기업은 경영학 전공자 이외의 인재들에 대하여는 가려보려고 하질 않는다. 앞으로는 전문성과 함께 인성과 창의성을 두루 갖춘 사람들이 필요하다고 하는데, 바로 그 같은 ‘T’자형 인재나 제너럴 스페셜리스트의 한 축을 인문학이 담당하고 있다. 인문학적 상상력이나 지식합성에 대한 사회적 요구가 늘어나는 최근의 현상을 기업들도 모른척해서는 안 될 것이다. “애플은 변함없이 인문학과 기술의 교차로에 서 있었다.” 취업 시즌을 앞둔 시점에서 아이폰을 개발한 스티브 잡스의 말을 한 번 더 강조해두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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