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홍진 한남대 문창과 교수 |
지인들과 저녁을 먹다가 삼성 vs 두산의 플레이오프 결정전을 힐끔 보았다. 보는 스포츠에는 별로 흥미를 못 느끼는 나에게도 한 가지 관심은 있었으니, 그것은 '누가 시구를 했냐'다. 왜, '여신'이 등장하니까! 그래서 '혹시 누가 시구를 했는지 아냐'고 물었다. 그러나 그들은 진짜로 몰라서인지 알면서도 무관심한 체하는 건지, 나의 기대를 저버리고 '모른다. 인터넷에서 찾아봐라'는 무심한 반응이었다. 그래, 여신의 계보학을 들춰보니, 멋지다.
시구의 역사적 전통은 종주국인 미국에서 시작되었음은 웬만한 이는 다 안다. 올해에는 오바마가 던졌다나. 야구의 승패란 타이밍이라고들 하는데, 여신의 시구는 미모답지 않게 형편없기 짝이 없다. 그러나 실망은 금물이다. 그게 시구의 온전한 매력이며 핵심 미덕이니까. 투수의 투구 폼을 흉내내는 애교스런 모양새나 포물선을 그리며 느리게 날아가는 공의 속도, 또 그것을 보란 듯이 헛방망이질 하는 시타자, 야구의 본질을 정면에서 위반하는 이 장면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점은 시구자의 명성이다.
전두환, 유인촌 등도 야구사에서 꼭 기억할 만한 인사지만, 누가 뭐래도 시구의 백미는 출중한 미모를 자랑하는 눈부신 여신들의 등장에 있다. 그녀들은 도저히 인간의 탈을 쓰고는 그렇게 예쁠 수 없기 때문에, 우리들 필부필녀처럼 선천적으로 지극히 운도 없고 또 후천적으로 뜯어고칠 재력마저 없는 이들로서는 마땅히 여신이란 칭호로 불러줘야 예의에 걸 맞다. 피그말리온의 석상 같이 곱고 늘씬한, 거기에 더해 청순가련한 매혹에 우리의 시각은 일순 마비된다.
야구 종주국에서 머라이어 캐리, 홀리 메디슨 같은 전설적인 스타가 시구녀로 등장해 시각적 쾌락, 혹은 사회 집단적 관음을 한껏 자극했던 것처럼 한국에서도 마찬가지다. 올해는 또 어느 여신이 맵시를 뽐내며 던질지 모르겠지만, 그리하여 또 얼마나 분분한 상찬의 이야기들이 회자될지 모르겠지만, 한국의 소녀 스타들 역시 종주국에 뒤지지 않는다. '소녀시대'의 유리, 윤아, '카라'의 한승연, 보아 등. 또 누가?
원형경기장 한복판에서 범인으로서는 감히 범접할 수 없는 미모를 과시하며 홀로 선 시구녀, 그녀들은 남성지배적 무대에 기꺼이 개입해 시각적 쾌락을 선사하는 관음의 대상이 되기를 마다하지 않는다. 피에르 브르디외를 빌려, 야구가 '문화자본'이라면 선수의 팔은 '신체자본'이랄 수 있겠고, 신체의 기능이 아닌 외양의 생김새가 생산과 소비를 창출한다는 점에서 여신의 포즈는 미적 자본이라 할 만하다. 이를테면 우리 사회의 루키즘이나 '여신 신드롬'은 육체가 일종의 제도적 소비의 차원으로 대상화되고 관리되며 상품화되는 한 현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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