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윤희]사라지는 것들에 대하여

  • 오피니언
  • 사외칼럼

[김윤희]사라지는 것들에 대하여

[교육단상]김윤희 대전둔천초등학교장

  • 승인 2010-10-12 14:26
  • 신문게재 2010-10-13 20면
  • 김윤희 대전둔천초등학교장김윤희 대전둔천초등학교장
교장실 앞에 풍선초가 달랑거린다. 풍선초는 씨앗을 뿌리고 지주를 만들어 주면 솜씨 좋은 디자이너처럼 금방 싱그러운 커튼을 드리워준다. 하얀 꽃이 반짝이던 자리에 꽈리 모양의 풍선을 촘촘하게 달아주는 것도 매력적이다. 열매는 작은 바람에도 살랑이다가 빗방울이 지나갈 때면 깔깔거리기도 하면서 '어린 날의 재미'라는 꽃말을 연상시켜 주었는데, 지금은 커피색으로 물이 들면서 하나 둘 자기가 태어난 곳으로 돌아가고 있다.

▲ 김윤희 대전둔천초등학교장
▲ 김윤희 대전둔천초등학교장
가을이다. 가을에는 빨간 스커트가 입고 싶어 옷가게를 기웃거린다. 오래된 친구를 만나기 위해 기차에 훌쩍 오르고 싶기도 하다. 그러나 만남이 없으면 어떠리. 어차피 몸은 두고 마음만 떠나는 것을. 언제부터인가 내게서 여행이란 단어가 실종되고 있다. 그저 마음만 만지작거리는 것으로 절반의 여행을 대신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골똘해 지는 것도 이맘때다.

우리는 흔히 '자유'가 그리울 때 여행을 떠나곤 한다. 풍선초처럼 열매도 내려놓고 가벼워지고 싶은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가이드의 안내에 따라 부지런히 시간을 체크하면서 버스에 오르내린다. 여행이 또 다른 구속으로 이어지는 아이러니다.

여행에서 얻고 싶은 것으로 새싹 같은 에너지도 꼽아본다. 새로운 에너지와 만남은 행운이지만, 내 경우에는 피로가 더 커서 기대하기 어려운 과제에 해당된다. 떠날 때의 꿈이 돌아올 때 많이 포개어지는 장소를 찾아서 의견도 분분하지만, 개인의 기호로 인해 머리만 크고 꼬리가 작아지는 것도 여행의 일면이다.

오래 전에 유럽을 갔을 때 일이다. 알프스 산에서 흘러내리는 옥색 물빛이 예뻐서 발을 담가보고 싶은 유혹을 받았다. 그런데 돌아오는 길에 만난 우리나라의 야트막한 야산과 시냇물이 어찌나 정겨운지 눈시울이 붉어졌던 기억이 난다. 유럽의 돌 문화에서는 그 무게만큼이나 중후하고 거대한 느낌을 받았다. 덕분에 그들의 후손은 대대로 유산을 물려받고 있는 것이 부럽기도 했다.

그런데 윤택한 그들의 문화 한가운데 서서 문득 우리나라의 나무문화가 그리워졌다. 묵직한 돌 문화에서는 어떤 신의 계시가 느껴지는가 하면, 가볍고 부드러운 나무문화에서는 인간적인 향기가 나는 것 같았다. 작지만 섬세하고 은은한 명상의 문화가 우리의 것이라는 결론을 보듬은 것이다.

퇴직한 어느 선배의 사진 작품에서는 우리나라 곳곳이 보석으로 반짝이고 있어서 보물찾기에 나서고 싶어지기도 한다. 우리 것에는 추억이 있고 정이 있어 가는 곳마다 쉼터가 되지만, 다른 나라는 아무리 좋아도 달력 속의 풍경으로 머물고 말기 때문에 학습이나 비즈니스가 목적이 아니라면 내가 사는 곳부터 둘러보는 것이 좋지 않을까 싶다. 공항에 길게 줄을 선 이들에게도 들려주고 싶은 얘기다.

우리에게 여행이란 대개 어릴 적 소풍으로 출발한다. 설렘은 늘 미리 다가와서, 비가 오는지 안 오는지 하늘을 몇 번이나 올려다보게 한다. 소풍날에는 먼 길을 걷는 것이 다소 힘들지만, 일 년 중 유일하게 먹는 김밥이랑 보물찾기로 폴짝폴짝 뛰어노는 아기염소들처럼 즐거웠다.

그런데 지금은 '소풍'이란 말이 사라지면서, 대신에 '현장체험학습'이란 이름으로 우리 아이들을 하루 종일 버스에 오르내리게 한다. 동심의 설렘은 예나 지금이나 같겠지만 왠지 잃어버리는 것이 더 많은 것 같은 아쉬움이 묻어나기도 한다. 그러나 어쩌면 이것은 모두 사라지는 것들에 대한 연민인지도 모른다. 문제는 시간과 공간이 아니라, 비어가는 마음에 얼마나 질 좋은 에너지를 채우는지 그것이 중요한 것이다.

이번 주말에는 김밥을 싸 들고 단풍이 좋은 곳으로 소풍이나 가 볼까? 가을도 언젠가 사라질지 모르는 계절이란다.

중도일보(www.joongdo.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 금지

기자의 다른기사 보기

랭킹뉴스

  1. 생명종합사회복지관, 제15회 시가 익어가는 마을 'ON마을축제'
  2. 상명대, 제25회 대한민국 반도체설계대전 'SK하이닉스상' 수상
  3. 충남대병원, 만성폐쇄성폐질환 적정성 평가 1등급
  4. [날씨] 단풍 절정 앞두고 이번 주말 따뜻한 날씨 이어져
  5. 서구 소외계층 60가정에 밑반찬 봉사
  1. 한국건강관리협회, 창립 60주년 6㎞ 걷기대회 개최
  2. 대전 노은지구대, 공동체 치안 위해 '찾아가는 간담회' 실시
  3. 샛별재가노인복지센터 생태로운 가을 나들이
  4. 외출제한 명령 위반하고 오토바이 훔친 비행청소년 소년원행
  5. 찾아가는 마을돌봄서비스 ‘마음아 안녕’ 활동 공유회

헤드라인 뉴스


내년 8월 국내 유망 중소기업들 대전에 집결한다

내년 8월 국내 유망 중소기업들 대전에 집결한다

내년 8월 국내 유망 중소기업들이 대전에 집결한다. 대전시는 '2025년 중소기업융합대전'개최지로 25일 광주 김대중컨벤션센터에서 열린 올해 행사에서 대회기를 이양받았다. 내년 대회는 대전 컨벤션센터에서 열린다. '중소기업융합대전'은 중소기업융합중앙회 주관으로 중소기업인들 간 업종 경계를 넘어 교류하는 것이 목적이다. 분야별 협업 생태계를 구축하기 위한 지역별 순회하는 화합 행사 성격도 띠고 있다. 2004년 중소기업 한마음대회로 시작해 2014년 정부 행사로 격상되었으며 2019년부터는 중앙정부와 지방정부가 공동으로 개최하고 있다..

대전 사립대 총장 성추행 의혹에 노조 사퇴 촉구…대학 측 "사실 무근"
대전 사립대 총장 성추행 의혹에 노조 사퇴 촉구…대학 측 "사실 무근"

대전의 한 사립대학 총장이 여교수를 성추행했다는 의혹이 불거져 경찰이 수사에 나선 가운데, 대학노조가 총장과 이사장의 사퇴를 촉구했다. 대학 측은 성추행은 사실무근이라며 피해 교수 주장에 신빙성이 없다고 반박했다. 전국교수노동조합 A 대학 지회는 24일 학내에서 대학 총장 B 씨의 성추행을 고발하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이날 성추행 피해를 주장하는 여교수 C 씨도 함께 현장에 나왔다. 선글라스와 마스크로 얼굴을 가린 C 씨는 노조원의 말을 빌려 당시 피해 상황을 설명했다. C 씨와 노조에 따르면, 비정년 트랙 신임 여교수인 C 씨는..

[르포] 전국 최초 20대 자율방범대 위촉… 첫 순찰 현장을 따라가보니
[르포] 전국 최초 20대 자율방범대 위촉… 첫 순찰 현장을 따라가보니

"20대 신규 대원들 환영합니다." 23일 오후 5시 대전병무청 2층. 전국 최초 20대 위주의 자율방범대가 출범하는 위촉식 현장을 찾았다. 김태민 서대전지구대장은 마을을 지키기 위해 자원한 신입 대원들을 애정 어린 눈빛으로 바라보며 첫인사를 건넸다. 첫 순찰을 앞둔 신입 대원들은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고, 맞은 편에는 오랜만에 젊은 대원을 맞이해 조금은 어색해하는 듯한 문화1동 자율방범대원들도 자리하고 있었다. 김태민 서대전지구대장은 위촉식 축사를 통해 "주민 참여 치안의 중심지라 할 수 있는 자율방범대는 시민들이 안전을 체감하도록..

실시간 뉴스

지난 기획시리즈

  • 정치

  • 경제

  • 사회

  • 문화

  • 오피니언

  • 사람들

  • 기획연재

포토뉴스

  • 장애인 구직 행렬 장애인 구직 행렬

  • 내일은 독도의 날…‘자랑스런 우리 땅’ 내일은 독도의 날…‘자랑스런 우리 땅’

  • 놀면서 배우는 건강체험 놀면서 배우는 건강체험

  • 서리 내린다는 상강(霜降) 추위…내일 아침 올가을 ‘최저’ 서리 내린다는 상강(霜降) 추위…내일 아침 올가을 ‘최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