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표언복 목원대 국어교육과 교수 |
나는 그게 우리가 예외 없이 쓰는 '택시'를 의미하며, 떡볶이집 하나를 내면서도 '분식센터'로 적기를 고집하는 바로 그 '센터'라는 말의 그들 식 표현이라는 것쯤은 금방 알아낼 수 있었다. '컴퓨터'에 '전자 뇌'라는 뜻의 '전뇌(電腦)'란 이름을 달아주고, '미니스커트'를 '너를 유혹하는 치마'라는 뜻의 '미니군(迷爾裙)'이라 부르는 사실을 알게 된 뒤 용어 하나를 쓰면서도 한사코 자기의 것, 자기들 방식을 내세우려 하는 그들의 고집스러움이 바로 내 두려움의 정체였음도 쉽게 깨달을 수 있었다.
윤치호는 1885년 2월 15일자 일기에서 “외국인이 업수이 여기기를 마치 개나 돼지처럼 하는데도 스스로를 중화인민이라 하고, 타국인을 가리켜 오랑캐라 한다”고 적고 있었다. 남이야 뭐라거나 말거나 '자기'와 '자기의 것'에 대한 깊은 믿음과 사랑을 바탕으로 한 이 같은 고집스러움은 때론 근거 없는 망상이거나 터무니없는 오기처럼 생각되기도 한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바로 이 자애·자신· 자존이야말로 '나로 하여금 나대로, 나답게' 살게 하는 힘의 원천이 아닌가. 그리고 이 힘이야말로 개인으로 하여금 더 큰 인물이 되게 하고, 집단으로 하여금 더 강한 집단이 되도록 추동하는 원동력 아닌가.
중국 정부는 몇 해 전 자기나라에 주재하는 외신기자들을 상대로 하는 '브리핑'이라는 것에 보통화(普通話)만을 쓰겠다고 선언했다. 보통화란 중국식의 표준어에 해당하는 이름이다. 기자들의 불만이 하늘을 찔렀겠지만 '내 나라에 들어왔으니 내 나라 말로 소통해야 하지 않느냐'는 명분 앞에 뾰족한 도리가 없었을 것이다. 북경에 파견된 외신기자들이 앞다퉈 중국어 학습에 열을 올리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은 말할 나위도 없는 일이다. 여기에서도 중국인 고유의 그 고집은 유감없이 발휘된 셈이다.
지난 봄, 대전의 유성구 의회는 관내의 한 행정 동 이름을 '관평테크노동'이라 정하는 결정을 내린 적이 있다. '테크노 밸리'가 중심을 이루는 마을이니 '글로벌' 시대에 어울리는 이름이라는 생각들이었겠지만 낯 뜨겁기 그지없는 일이었다. 우리나라 '의원님'들의 의식수준이 고작 이 정도인가 싶은 생각에 크게 절망스럽기도 했다.
끈질긴 여론의 뭇매를 맞고 다시 되돌렸으니 다행한 일이긴 하나 우리의 언어정책을 진지하게 검토해 볼 계기로 삼을 만한 일이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우리나라의 언어정책은 완전한 방임주의라 할 것이다. '주의'라면 그래도 어떤 철학이 있을 것이겠으나 그런 것도 아니니 '방임상태'라 해야 더 어울리겠다. 거의 무정부 상태에 가까운 우리나라의 언어 사용실태를 보면 선뜻 시비하고 나설 수도 없을 것이다.
당장, 앉거나 서 있는 자리 바로 그곳에서 거리에 차고 넘치는 무수한 간판이나 광고물들을 한번 보라. 그리고 제대로 된 표기나 표현이 몇 개나 되는지 살펴보라. 규정에 어긋나고, 어법이나 문법에 맞지 않는 용어나 표현들은 지적 정보 부족 때문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애써 우리글을 외면한 외래어의 남용이나, 멋대로 왜곡하고 파괴시켜 참으로 불쌍한 모습을 하고 있는 우리 글 신세는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대·소, 상·하, 좌·우, 내 것과 남의 것을 구별하는 기본적인 상식조차 갖추지 못한 한글 사용실태를 보면 이 나라에 과연 '어문규정'이 있기나 한지 궁금할 때가 있다.
반만년 주권국가에 어문규정이 없을 리 없다. 있지만 아무도 지키려 들지 않고, 있는지 없는지 모르는 사람이 적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 문제는 이런 현상이 국가 공공기관에서 더욱 심하다는 점이다. 국가는 어문규정을 만든 주체다. 따라서 국가는 이의 올바른 시행에 누구보다도 앞장서 노력해야 할 책임을 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있는 이름 앞 다퉈 외래어로 바꾸고, 제도마다 정책마다 외래어 이름 붙이기 경쟁하듯 하는 국가기관들을 보면 언어주권을 아예 포기해 버린 나라 같다. 국치 100년, 우리 말· 글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걸었던 선열들에게 부끄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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