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침개를 먹던 고향의 추석 풍경이 그립습니다. 이젠
가 볼 수 없는 곳이지만….”
서구 월평동에 사는
한나리(33·가명)씨는
코앞으로 다가온 추석이
마냥 즐겁지만은 않다.
추석 때면 오랜만에 만난
피붙이와 웃음꽃을 피우기 마련이지만 그럴 수 없다.
고향이 그리우면
통일전망대에서 아련히
보이는 북녘 땅을 바라보는 것이 전부다.
함경북도 신포가 고향인 한씨는 북한이탈주민이다.
부모님을 일찍 여읜 한씨는 오빠들과의 추억이 많다.
그녀는 “북한에서 추석 때면 공장 근로자인 큰 오빠(46)와 군인인 작은 오빠(37) 손을 붙잡고 부침개, 떡 등을 가득 담아서 마을 뒷산에 올라가 놀았던 기억이 선명하다”고 회상했다.
이어 “만두 만한 크기의 송편과 찰떡을 만들어 오빠들과 나눠 먹고 밤에는 카드도 하고 옥수수 술도 먹었다”며 고향 생각에 잠겼다.
한씨가 북한을 탈출한 때는 지금으로부터 10년 전.
고등중학교(6년제)를 졸업하고 '돌격대'(공사판)와 통조림 공장을 전전할 시기였다.
지독한 굶주림이 고향을 등지게 된 이유였다.
▲ 북한이탈주민 한나리씨가 고향의 추석 풍경를 그리는 듯 먼하늘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겨 있다./지영철 기자 ycji07@ |
한씨는 “김일성이 죽은 1990년대 중반부터 배급이 시원치 않았고 어쩌다 쌀 1㎏씩 나왔는데 이것으론 배고픔을 참기 어려웠다”며 “산에서 강아지풀도 뜯어 먹고 음식을 훔쳐 먹기도 했다”고 말했다.
그녀는 한국으로 가면 배불리 먹을 수 있고 정착금과 집도 준다는 소문을 듣고 혈혈단신 두만강을 건넜다.
중국에서 한씨는 도망자 신세로 이곳저곳을 전전했고 이 과정에서 중국 공안에 붙잡혀 악랄하기로 이름 높은 함경도 '오로 단련대'에서 강제노역을 하기도 했다.
어렵게 풀려난 한씨는 미완(未完)에 그친 한국행을 실현하고자 오빠들에게 “중국에 가서 돈을 벌어오겠다”라는 편지만 남기고 다시 고향집을 나섰다.
그런 숱한 고난의 세월을 이겨낸 한씨는 지난 2005년 꿈에 그리던 한국 땅을 밟았다. 이후 대전에 정착해 식당일을 하면서 남편(38)을 만나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딸(2)도 얻었다.
이번 추석에는 경기도 수원의 시댁을 찾아 시댁 식구들과 단란한 시간을 보낼 계획이다. 희망이 무엇이냐는 기자의 물음에 한씨는 잠시 망설이더니 작지만 또렷한 목소리로 '통일'이라고 했다.
그녀는 “통일이 되면 고향의 부모님 산소에 성묘도 하고 추석 때 자주 가던 마을 뒷산에도 가고 싶다”며 “밤늦게 집에 온다며 꾸짖던 오빠들과 자주 싸웠는데 오빠들이 어떻게 변했을 지도 궁금하다”고 눈물을 글썽였다. /강제일 기자 kangjei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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