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향미 태안 이원초 관동분교장 |
포슬포슬한 감자가 익어가는 가스불 앞에서 여러 생각이 오고 갔다. 그래도 아이들이 이렇게 무사히 학교에 나와 줘서 얼마나 다행인가라는 생각에 태풍에 대한 두려움도 잊혀지는 것이었다. 사랑스런 아이들과 함께할 수 있는 이 시간들이 그냥 그렇게 감사할 따름이었다. 그러면서 몇 년 전에 친정어머니를 모시고 수업을 한 날이 생각났다.
좀 더 큰 도시로 나가 공부하고픈 딸을 교대에 억지로 보내 놓고 그것이 잘한 일인지 늘 빚진 마음으로 가슴졸인 어머니를 모셔 놓고, 교사의 길을 걷게 해 주신 부모님께 감사하는 자리를 마련했던 것이다. 교직에 들어선지 13년만의 일이었다.
사실 나는 교사의 역할에 대한 두려움과 부모님의 권유과 교대에 입학해서 매번 투정뿐이었다. 첫 발령을 받고 매일 학교생활을 궁금해 하시던 부모님께 아이들과의 생활을 말씀 드리기는 커녕 교사의 직업은 어렵고 힘든 거라고, 나의 길은 아닌 것 같다며 부모님의 마음을 힘들게 하곤 했다.
그렇게 교직에 발을 디뎠고 그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고자 했지만 눈 뜰 때마다 잘하고 있는 것인가 걱정이 앞서는 날도 많았다. 백혈병에 걸렸던 견호가 국어교사의 길을 걷겠다며 자신의 병을 이겨내며 우뚝 서는 모습도 보았고, 사진작가의 길을 가겠다며 하루하루 열심히 살아가는 희운이도 만났다. 그런 날들이 나를 강하게 만들었고 나름대로의 길을 열심히 걷고자 했다. 그것이 어머니를 모실 수 있는 힘을 준 것인지도 모르겠다.
정말 화창한 가을날이었다. 여섯 명의 아이들이 눈앞에 있었고 그런 아이들의 수업을 보기 위해 아이들의 수 보다 더 많이 함께해 주신 부모님과 동료선생님들. 그 사이에 나의 어머니께서 앉아 계셨다. 난 어머니를 보면서 수업을 했고, 어머니는 나를 보며 눈물을 글썽거리셨다. 교장 선생님께서 선물하신 빨간 장미는 넘치도록 붉은 기운을 냈고 그 사이 사이로 어머니의 행복한 미소를 엿볼 수 있었다.
그날의 수업은 솔직히 매끄러운 수업은 아니었다. 수업시간에 딴짓하면 혼난다는 학부모님의 말에 한 아이는 심통이 났고 그 이후 아이는 수업에 참여하지 않았다. 그 아이를 달래느라 수업을 진행시키느라 한 시간이 어떻게 흘러갔는지 모르는 수업이었다. 하지만, 이 또한 나의 교실에서 매일 만나는 상황이 아니던가? 그런 실제의 상황을 그대로 보여줄 수 있게 해 준 아이가 고마울 지경이었다.
나중에 어머니께서는 말씀하셨다.
“그 아이 정말 밉더라. 우리 딸 고생 시키잖어! 그런데 너 진짜 잘해내더라.”
“어머니, 귀한 아이들을 만날 수 있도록 해 주셔서 감사해요. 저를 믿고 기다려주셔서 고맙습니다.”
오늘 저녁에는 어머니 댁에 들러야겠다. 곤파스 때문에 급식 못한 일, 비닐하우스 세 동이 무너져서 새벽부터 부모님을 도와 일했다는 문수, 재산 피해가 많았다는 채민이, 자기네 집은 피해가 없다고 환하게 웃는 대안이, 천둥 번개 때문에 무서웠다는 효승이, 다른 집 아파트 베란다 문이 떨어져 나갔다며 걱정하는 유환이, 사랑스럽고 귀한 아이들의 이야기를 들려 드리러 갈 것이다. 그 아이들이 나를 믿고 그 자리에서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까지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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