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중겸 전 충남지방경찰청장 |
어렸을 적에는 어려운 말에 귀 쫑긋했다. 다리가 나오면 한숨 돌린다. 제대로 된 게 아니다. 실개천 바닥에 뻥 뚫린 드럼통 눕혀 놨다. 물길 냈다. 그 위에 통나무 몇 개 얹혀 놓았다. 편리하기는 했다. 바지 걷고 물장구치며 개울 건너던 재미는 사라졌다. 그쯤에서부터 아버지는 이런저런 얘기를 많이도 들려주셨다. 세상 살아가는 데 필요한 교훈거리. 현장교육이었다.
다리 아래서 원(員;고을 다스리는 수령) 꾸짖지 말라도 그 하나. 숨어서 불평 말고 직접 당당하게 말하라는 가르침. 그와 같은 속담이나 경구가 결국 성격형성의 밑바탕 됐다. 어려서는 무슨 뜻인지 잘 몰랐다. 알아듣는 양 고개 그냥 끄덕였다. 그러다 보면 어느 새 산소가 눈에 들어왔다. 그런 기억창고 오름길. 거길 가보지 못하고 있었다.
기연 아우의 시골집에 갈 일 생겼다. 아침 일찍 집 나섰다. 187km 달려서 도착. 들른 다음 산으로 향했다. 도착할 무렵 비가 쏟아졌다. 가을장마라. 기어코 오네. 발길 돌렸다. 오랜만에 느긋하게 드라이브. 정든 이곳저곳 찾아가 보기로 한다. 읍내로 향발. 변함없다. 철길 끝나는 지점 지나간다. 도선장 나온다. 소문은 들었지만 낯설다. 뱃길 끊긴 부두. 120t 통통배 금강(錦江)호는 자취조차 없었다. 매표소와 대합실은 대구탕 집으로 변해 있었다. 갯벌과 호안에는 바닷물이 왔다가 가고는 했다.
보따리 장수와 통학생은 어디 갔는가. 광장 오른쪽 신창이네 가게. 고깃배 배터리 팔고 수리하던 진주전업사. 장사 잘돼서 남부럽지 않게 살았다. 왜 그럴까. 어둠침침하다. 폐업했나. 왼쪽으로 즐비했던 다방과 상점. 없어졌다. 배드민턴장이 들어섰다. 주민이 자주 이용한다면 좋겠다는 생각 들었다. 이이들과 엄마아빠가 치는 광경을 상상한다. 정겹다. 코흘리개 시절 발동기선 타기는 소원이었다. 솨 솨 파도 가르는 소리가 좋았다. 전후좌우로 흔들리는 요동에 몸 맡기면 경쾌했다. 바다 저쪽에 별일 없어도 도선을 타고 싶었다.
더 신나는 건 돛단배였다. 발동선 타면 내려서 십리길 걸어야 집에 도착. 범선으로는 동네 어귀에서 내렸다. 그뿐인가. 스릴 만점. 작은 배였다. 한 열댓 명 탈까말까 했다. 서해와 금강의 물이 뱃전을 스친다. 물보라 뒤집어쓴다. 흥건히 젖는다. 파도치면 기우뚱.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다. 간이 콩알만 해진다. 오줌 지리기도 했다. 강경까지 갔었다던가. 혼자 오갈 때는 일부러 옥포에서 내렸다. 사오 리 길 걸어야 집에 들어섰다. 전율과 상쾌함 더 맛보려고 그랬다. 여전히 잘 있는지 궁금했다. 거기도 가 봤다.
도중에 마주친 수문. 바닷물 역류 막는 역할을 했었다. 그렇지 않아도 우물물이 짰었다. 그 문이 없으면 먹는 물은 아예 소금물. 하구언 생겨 용도폐기. 녹슨 철골되어 있었다. 올라오는 길에 본 창선네 집. 코너가 약국으로 변해 있었다. 아들송사에 힘들었다더니 세 준 건가. 묻기가 어렵다. 이런 게 고향이다. 오라 가라 하나. 그냥 간다.
지세(地勢)와 지형(地形)과 지위(地位)는 같은 뜻. 고향의 산과 물과 풀과 나무가 나를 만들었다. 내 위치와 풍모의 근원. 뿌리 확인이 귀향이다. 나 부르는 영혼의 울림이다. 길 막혀 백령도 가서 해주 보며 우는 이도 있다. 만사휴의(萬事休矣)라도 기다리는 고향. 당신은 행복하다. 또 오라고 말 거는 고향. 귀하는 복도 많다. 추석에는 고향 집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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