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 엔진에 물이 들어가 못쓰게 됐어유. 이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슈.”
태안 영목항에서 만난 한 어민은 태풍 '곤파스'가 휩쓸고 간 마을을 바라보며 망연자실한 표정을 지었다.
비교적 고요했던 영목항 앞바다에 2일 오전 2시 30분부터 성난 파도가 들이닥쳤다. 이로부터 3시간 동안 제대로 서 있기도 힘들 정도로 거센 바람과 빗줄기가 영목항을 휩쓸었다.
무탈을 바라며 항구에 그토록 단단히 묶어놓았던 줄이 끊어지면서 고깃배가 뒤집혀 바다로 쓸려 내려갔다.
강풍은 항구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 횟집 간판도 그냥 지나치지 않았다. 여기저기서 점포 간판과 가옥 유리창이 파손돼 어지럽게 나뒹굴었다.
영목항 신창성 어촌계장은 “태풍이 온다고 해서 밤새 뜬눈으로 지새웠는데 평생 겪어보지 못한 바람이 불어 닥쳐 손쓸 틈도 없었다”며 “더욱이 정전으로 양식장과 횟집 수족관에 산소를 공급할 수 없어 수산물 피해는 가늠할 수도 없다”고 허탈해했다.
얼마 전 집중호우로 큰 피해를 본 태안 농경지는 아예 쑥대밭이 됐다. 노랗게 영글고 있던 벼는 풍년을 꿈꾸던 농부 눈앞에서 속절없이 쓰러져 갔다.
고남면에서 7900여㎡ 가량의 벼농사를 짓는 이평우(65)씨는 “거센 바람 앞에 1년 동안 피땀 흘려 가꾼 벼가 모두 쓰러졌고 이웃들도 모두 같은 상황이다”라며 “이대로 가면 예년 수익의 50%도 건지지 못할 판”이라며 하소연했다.
도로 옆과 인근 야산에 심어져 있던 소나무 수천 그루가 맥없이 뿌리째 뽑히거나 꺾여진 채 곳곳에 널브러져 흡사 전쟁터를 연상케 했다.
태안군청 한 공무원은 “정전 때문에 일선 농ㆍ어촌과 연락이 잘 닿지 않아 정확한 피해 규모조차 파악이 어렵다”며 “도시 전체가 폭탄을 맞은 모습이다”라고 혀를 내둘렀다.
서산에서도 시내 거의 대부분의 교차로 신호등이 엿가락처럼 휘었으며, 고층은 물론 저층의 간판들이 길거리에 어지럽게 내팽개쳐져 차량들은 온 종일 곡예운전을 해야만 했다.
시내 대부분의 점포와 가구가 정전으로 인해 도시 전체가 캄캄한 암흑으로 변하면서 한편의 재난영화 같은 장면들이 속속 연출되기도 했다.
보령시 도서 지역도 태풍 곤파스 앞에서 초토화됐다.
160여 가구 5500여 명이 거주 중인 외연도에서는 사랑나무로 알려진 동백나무와 빼어난 자태를 자랑하던 천연기념물 136호인 상록수림도 절반 가까이 피해를 입었다.
삽시도도 가옥 서너 채가 강풍 때문에 힘없이 주저앉았고 '섬 소년'의 희망을 가꿔가던 온천초 삽시분교 지붕도 바람에 날아갔다.
대전 과수농가 농민들도 가슴을 쳤다. 동구 삼정동 인근 포도 및 복숭아 재배 10여 가구는 밤사이 태풍 곤파스의 강풍을 피해가지는 못했다.
90% 가까이 차지하는 포도 농가 주민들은 오전 일찍부터 밭으로 나와 떨어지고 짓무른 포도를 애달픈 마음으로 쓸어 담았다.
복숭아 농가에서도 나뭇가지가 밑동부터 부러지는가 하면, 일부 과수는 강풍에 맥을 못 쓰고 우수수 떨어지면서 울상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손현기(54)씨는 “당장 오는 15일 가격과 당도가 가장 좋은 만생종의 수확이 어려울 것 같다”며 “13년째 농사를 짓고 있지만, 이번 태풍은 지난 2002년 태풍 매미를 능가하는 것 같다”고 한숨지었다. /강제일·이희택·태안=김준환·서산=임붕순·보령=오광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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