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표언복 목원대 교육대학원장·국어교육과 교수 |
나라의 고민이 깊어 지난 5년동안 막대한 예산을 들여 해산율을 끌어 올리고자 노력했으나 효과는 신통치 않았다. 지금 나라에선 앞으로 5년간 어떤 정책을 펴야 할지를 두고 깊은 고민에 빠져 있는 듯하다. 얼마 전 보건복지부가 외국의 인구문제 전문가들을 초청하여 대규모 국제학술행사까지 연 데서 그 고민의 깊이를 짐작할 수 있다.
인구문제는 마땅히 나라가 지속적으로 관심을 갖고 변동 추이를 점검하며 그때 그때 적절한 대책을 세워야 할 중요한 일중의 하나이다. 그러나 인구문제에 대한 그간의 나라 정책은 진단도 처방도 지나치게 경제적 관점에서만 접근하려 했다는 비판을 면할 수 없을 것이다.
해산율의 저하는 경제인구의 감소와 인구의 고령화를 초래하고, 이는 결국 나라의 경제발전에 심각한 저해요인이 될 것이라는 게 나라의 진단이고, 출산비나 교육비 보조같은 경제적 지원을 늘리면 해산율이 높아질 것이라는 것이 나라의 처방이었다. 외환위기를 겪고 오랜 기간 불황에 시달려 오는 사이 너 나 없이 경제제일주의 의식에 볼모가 되다시피 한 국민들로서는 나라의 진단에 의심을 가질 만한 여유가 없었다.
돈 주고 분유 사주겠다는 나라의 처방을 마다할 이유는 더더욱 없었다. 그러나 지난 5년간 추진해 온 ‘제1차 저출산 고령사회 기본계획’은 크게 실패하고 말았다. 2006년부터 무려 20조 원 가까운 막대한 예산을 투입했는데도 불구하고 해산율은 세계 최저 수준으로 떨어지고 만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진단도 처방도 원점에서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할 계제이다. 해산율을 높이는 일이 과연 능사인가 따져 볼 일이며, 아이 낳기를 꺼리는 게 단순히 경제적 부담 때문인가도 돌아볼 일이다.
먼 장래를 위해서라면 다소간의 고통을 견디면서라도 인구는 늘리기보다 오히려 지속적으로 줄여 가야 할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사코 ‘증가’를 전제로 한 처방이라면 경제적 지원 중심의 대책은 마땅히 재고되어야 한다. 우리 사회의 폭넓은 해산기피현상은 결코 경제적 부담 때문에 비롯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전통적 가치의 상실과 가족문화의 붕괴에 더 큰 원인이 있다. 지금보다 훨씬 더 가난하고 어렵게 살던 시절에도 그 때문에 자식 낳아 기르는 일을 기피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가난할수록 자식은 그 가난을 면할 수 있는 ‘수단’으로 인식되었다. 하루 세 끼 끼니를 걱정하는 가난한 살림에도 희망의 끈을 놓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시루 속 콩나물 크듯 자라는 자식들이 있기 때문이었다. 몇 해 고비만 넘기면 그 자식들이 가정의 든든한 버팀목이 되고,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 확실한 후원자가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부모에게 있어 자식은 무엇보다도 확실한 ‘보험’이었던 셈이다. 자식 덕에 호강을 누리지는 못하더라도 최소한 자식 낳아 기른 일을 후회하는 경우란 흔치 않았다. 이같은 가족관계는 부모 자식 사이의 관계를 ‘천륜’이라고 여겼던 전통적 가치가 굳세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기르고 가르치는 일은 예전보다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어려워졌는데 기르고 가르친 보람을 느끼기란 갈수록 기대할 수 없는 일이 되고 있다. 못 먹고 못 입어가며 기르고 가르쳐 놓은 아들 딸 두고도 요양원에 들어가 쓸쓸한 만년을 보내고 있는 나이 든 부모들을 보면서 그래도 자식은 낳아 길러야 할 것이라고 생각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혼인하고 아이 낳아 기르는 일이 아주 어리석고 불확실한 ‘투자’가 되어 있는데 알량한 수준에 지나지 않는 양육비 몇 푼에 끌려 아이 낳기를 결단할 부모가 몇이나 될까.
경제적 취약계층에 대한 양육비 지원정책이야 더욱 장려할 만한 일지만, 밑빠진 독에 물붓기 식의 맹목적 물량공세는 지양돼야 한다. 이는 분명히 그릇된 진단에 적절치 못한 처방이기 때문이다. 지금쯤 우리 스스로 내팽개쳐 버린 전통적 가족문화의 회복을 강구해 보는 것은 어떨까. 부모와 자식, 형제와 자매의 관계를 천륜의 끈으로 하나 되게 하는 가치의 재정립, 그게 가장 확실한 대안인 듯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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