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크 라캉은 낚시 나갔다가 위대한 이론을 낚았다. “햇빛에 반사되는 저 정어리 캔은 우릴 못 보겠지요?” 동행한 청년 피터의 생뚱한 물음에 라캉은 '머릿속'이 환해졌다. '아! 정어리 캔의 빛나는 그 지점이 우리를 응시하는 출발점이겠구나.'
라캉의 유명한 시선 중심의 시각이론은 이렇게 탄생한다. 타인의 타인은 자아라는 것. 라캉을 알고 레비나스의 '타자 안의 나, 내 안의 타자'에 접근하니 갑자기 몇 계단 쉬워진다. 나와 너는 수없는 '우리'와 이어져 있다. 같은 내부거나 그러지 않을 수도 있다.
영화 '인셉션'의 안과 밖도 쉽지 않다. 꿈을 설계·통제하고, '꿈속'에 침투하는 줄거리도 그러려니와 미로에 미로, 미로의 안팎을 넘나들며 길을 잃지 않으려면 '평면적 사고'를 버려야 하는 것이 어렵다.
감정의 육각형, 이 역시 올 여름에 온전히 이해했다. 슐로스버그가 육각형으로 나타낸 표정 상관계에서 '웃음, 경멸, 놀라움'은 서로 이웃한다. 지금 날리는 웃음이 경멸이거나 놀라움일 수 있으며 경멸이 웃음이나 놀라움으로 오해될 수도 있다.
상대의 오른쪽 반신이 무의식 측이라면 오른 발, 라이트 훅 등으로 상대의 오른쪽을 가격하면 유리하다. 무의식 측을 재빨리 찾아내라. 시합 중에 파이팅 포즈를 좌우로 바꾸면 반드시 얻어맞는다. 마라톤 스퍼트는 무의식 측에서 앞질러야 한다. 작업 걸려면 의식 측에서 말해야 이성의 관심을 끌기 쉽다. 사진발도 의식 측 얼굴이 더 낫다.
글은, 오르거나 내리거나 제자리로 오는 펜로즈의 계단처럼 처음으로 간다. 안과 속은 어떻게 다른가. 2차원의 면은 '안', 3차원의 공간은 대개 '속'이다. 달빛은 '창틀 안'으로 들고, 자동차는 '터널 안'에 갇힌다. 도로나 창틀은 선 개념이다. 채워짐이 본질이면 '호박 속, 뼛속, 물속'처럼 쓴다. 사무실은 비어도 비정상 아니므로 사장실 '안'이다. 넣어두는 것이 고유 본성이라면 '안'을 생략, '지갑·서랍·트렁크·냉장고…에 넣었다'고만 하면 깔끔하다. 추상적인 명제에는 '폭풍 속으로', 포화 속으로'처럼 '속'이 익숙하다가도 '존재 안'에서는 사정이 달라진다.
이것은 현상학적 철학, 욕망이론이기도 하다. 정 어려우면 느낌에 충실하는 수밖에 없다. 정어리 캔에서 시각이론을 완성한 라캉은, 보기만 하는 게 아니라 보여짐의 존재가 '세계 속'의 인간이라고 했다.
모쪼록 '9월 속'으로 간 아까 그 지인이 9월을 채우길, 독자 여러분도 전생의 죄로 사랑하고 전생의 업으로 살아가기 버겁더라도 이 '가을 속'을 꽉꽉 채우고 빠져나오시길 기도한다. '속'은 비면 비정상!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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