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홍진 한남대 교수 |
혹자는 말장난이 심하다 비판하지만 말장난 자체를 폄하할 까닭은 없다. 그 저항성이나 전복성이 예전보다 약해져 업그레이드 좀 했으면 싶은 바람이다. 아무튼 '봉숭아 학당의 동혁이 형'이나 '남성인권보장위원회', '두분토론' 등과 같은 꼭지는 그나마 사회적 문제나 증상을 간추리되 말을 싹 비틀어 재미를 주는 묘미가 있다. 말장난이 사회적 문제나 이슈에 적용되면 자연스레 비판적 기능을 수행하듯, 말장난이 일상을 농담의 대상으로 삼는 순간 현실의 논리는 뒤집어지고 해체된다. 그리고 그 전복이 절묘하게 일상의 이면이 감춘 지배 관념과 논리에 시비를 거는 순간 말장난은 웃음을 동반한 쾌감을 준다.
농담이 웃음의 쾌감을 성공적으로 충족시키기 위해서는 당연히 갖추어야 할 게 있다. 예컨대 농담의 주체가 듣는 이의 욕망을 이해하고 금지된 욕망을 적절히 충격해야 한다. 말장난은 시중을 떠돌며 인구에 회자되는 우스갯소리에서도 중요한 구성원리다. 한때 유머 서사물이라 불렸던 참새, 식인종, 최불암, 덩달이, 만득이, 사오정 시리즈도 비슷한 맥락에 기초해 있다. 유머 서사물의 이야기꾼이나 개그맨들이 펼치는 농담에서 권위는 조롱거리가 되고, 금기는 해체되며, 고정관념은 면박 당하고, 정상은 비정상으로 폭로된다.
정신분석학자인 프로이트는 꿈, 농담, 실언과 무의식의 관계를 파헤친 인물이다. 그에게 꿈은 증후인 동시에 치료이듯 농담도 증후인 동시에 치료다. 억압된 무의식이 꿈이나 실언을 통해 자기(ego)도 모르게 말해지고 해방되듯 농담도 억압된 욕망을 풀어 즐거움을 준다. 말하자면 꿈, 농담, 실언은 무의식적 욕망의 표출이자 증후다. 그런데 꿈이나 실언은 사회성이 덜 하다면, 농담은 쾌락 만들기를 목표로 하는 정신적 기능 가운데 가장 사회적이다. 꿈은 타자와 소통하지 않지만 농담은 청자(관객)인 타자의 실제적 참여와 소통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요컨대 농담은 위반의 쾌감인 동시에 일종의 사회적 증후이기도 하다.
얼마 전 언론을 통해 어느 젊은 의원이 대학생들을 앞에 두고 아나운서라는 특정 직업의 여성을 소재로 희롱성 발언을 했다는 유쾌(?)한 소식을 접했다. 이와 관련해 최고 권력자를 비롯한 유명 여성 정치인들까지 희화화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말은 사회 윤리적 금기를 동반한다. 허용과 금지, 해도 되는 말과 하지 말아야 할 말을 가리지 못하면 설화(舌禍)를 입게 마련이다. 말하는 주체가 듣는 이의 욕망을 이해하고 금지된 욕망을 적절히 자극하는 '개콘'의 희극배우나 광대놀음을 지켜보는 관객이 아닌 이상 말이다.
'개콘'에도 금지의 힘은 존재할진대, 그리하여 점점 지겨워져 가던 차에 나름 한층 업그레이드된 '개콘'을 만나 충격이다. 그런데 이 경우 위반은 위반일진대 전복의 쾌감은 커녕 쓴웃음만 자아내게 했다. 왜냐하면 자주 반복되는 새롭지 못한 경험이고, 감춤의 미학을 져버리고 너무 노골적이라는 점이다. 슬픈 것은 단순히 그 증후가 개인무의식이라 치부할 수도 있겠지만, 비슷하게 반복적으로 환기되는 현상에 비추어 본다면 그것이 한 개인의 증후라기 보다는 집단적 증후, 아니 증상에 가깝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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