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세기부터 수많은 백제인이 아스카 일대로 건너와서 지역을 개발했다.
이러한 내용은 ‘일본서기’에서 찾아 볼 수 있다.
“ 오진천황 20년 9월, 야마토나아야 가문의 선조인 아지사주(阿知使主)가 그 자식과 도가사주(都加使主) , 자신이 거느리던 17현(縣)의 백성을 이끌고 건너왔다”는 내용으로 이는 5세기 중엽에 백제 왕족인 아지사주가 수만명의 백제인을 이끌고 아스카 땅으로 이주하였음을 말해 주고 있다.
아지사주(야마토노아야 가문)은 당시 오사카며 나라 지방의 지배자인 오진천황의 큰 지지를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를 바탕으로 아지사주(야마토나아야 가문)은 아스카 땅에 백제인의 힘으로 일본 최초의 절인 아스카 절(飛鳥寺)을 칠당(七堂) 가람으로 세우게 된 것이다.
즉 596년, 아스카 왕궁 인근에 백제에서 건너온 백제인 건축가들에 의해서 처음 세워진 것이 바로 아스카 절이다.
아스카 절은 588년에 착공, 596년에 완공됐다.
창건 당시의 아스카 절은 휫날인 1196년에 번갯불에 의한 화재 발생으로 소실됐다. 또한 당시 본존불상(석가여래좌상, 철불)도 대파하였다.
폐허가 됐던 아스카 절은 1956~57년 발굴됐다. 발굴결과 본존불상(석가여래좌상)과 부처님 사리함, 관옥 등 옥류가 발견됐다. 또한 금환, 구리쇠 말방울, 수키와 등 기와도 찾아냈다.
이 발굴 작업으로 아스카 절은 ‘1탑(塔) 3금당(金堂) 형식’으로 밝혀졌다.
최근 아스카절과 부여 왕흥사의 건축양식이 일본 학자들에게 큰 주목을 받았다.
왕흥사 터는 부여 부소산에서 북서쪽으로 백마강 건너편에 자리하고 있다.
왕흥사는 백제왕실의 원찰(願刹)로 알려져 있다.
최근 발견된 금은동 부처님 사리 용기를 통해 백제 제27대 위덕왕이 577년에 죽은 왕자를 위해 사찰임이 밝혀졌다.
왕흥사 터전은 탑과 금당, 강당이 일적선으로 연결된 일탑일금당으로 일본 오사카의 ‘사천왕사’식 건물 배치로 보이지만, 동서 양쪽의 부속 건물터는 일본에 아스카 절의 동금당,서금당으로 변했을 가능성이 크다.
또한 왕흥사 터에서 출토된 관옥 등 사리공양구와 기와의 연꽃무늬 문양도 동등한 것임을 알려준다.
이처럼 일본 최초의 절인 아스카절은 백제 왕흥사와 많은 부분이 닮아 있는 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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