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민찬 대전대 교수 |
다섯 해가 지나자 과연 주는 고기를 늘어놓은 정원을 만들었고, 고기를 굽기 위한 청동 기둥을 설치했으며, 술 지게미로 만든 언덕에 오르고, 술로 연못을 만들었다. 여기서 비롯된 고사성어인 '주지육림'은 술과 안주가 즐비한 호사스러운 술자리를 이르는 말로 요즘에도 더러 쓰이고 있다.
주는 결국 죽임을 당했고 은나라는 무너졌다. 일찌감치 기자는 상아 젓가락 하나를 보고서도 은나라에 장차 재앙이 들이닥칠 것을 알았던 것이다. 그래서 노자는 '도덕경'에서 “작은 것을 보는 것을 밝음[見小曰明]이라고 한다”고 설파했다. 미세한 것도 헤아려 볼 줄 아는 지혜야말로 진정한 밝음이라는 뜻이다.
그동안 살던 집을 정리하고 새 아파트로 이사한 것이 지난달이었다. 학교 다니는 아이들 때문에 꼼짝없이 묶여 십오륙 년을 한 자리에서 지내다 보니 어지간히 지겨워졌던 것이 이사의 변이다. 아파트 한 채 달랑 지니고 이쪽에서 저쪽으로 옮겨가는 처지인지라 큰손과는 처음부터 거리가 멀었고, 그렇다고 시세차익을 의도할 만큼 민감하지도 민첩하지도 못한 체질이다. 단지 바라는 것이라고는 조금 더 호젓하고 조금 더 숨쉬기가 쾌적한 집, 그것뿐이었다. 아파트 건설 현장이 도심에서 떨어져 있고 가까이에 있는 산이 제법 시민들의 산행처로 알려진 터여서 거기에 기대를 품었던 것이다.
다행히 새로 들어간 집은 전보다는 한결 호젓하고 쾌적하다. 날벌레가 많아서 그렇지 저녁에는 바람이 선선하게 들어오고 새벽으로는 닭 우는소리도 건너온다. 촘촘히 나무도 심어놓고 잔디도 가꿔 놓고 친환경 소재를 채택했다는 시공업체의 자랑에 어느 정도는 수긍이 간다.
그러나 군데군데 복병이 숨어 있어 '아차' 하는 때도 없지는 않다. 그중에서도 견디기 어려운 것은 차들이 내뿜는 요란한 소음이다. 창문 너머 펼쳐진 경관에 눈을 빼앗겨 그만 도로에서 올라오는 차 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못했다. 작은 것을 헤아릴 줄 알아야 했는데 그것을 빠뜨리고 만 것이다.
이사를 하면서 아내와 내가 새끼손가락을 건 것이 한 가지 있다. 가구가 됐건 가전제품이 됐건 바꿔야 할 것은 바꿔야 하겠지만 될 수 있는 대로 끌고 가자는 약속이었다. 그리고 버려도 되는 건 버리고 오자는 약속이었다. 그 약속은 차분하게 지켜지는 듯했다. 장롱과 식탁과 커다란 침대를 치우고 그 중 식탁만 하나 새로 장만했다. 전자레인지와 오디오세트와 식기세척기를 치우고 TV는 그대로 가져왔다. 그런데 그 가져온 브라운관 TV가 문제가 됐다. 십년을 훨씬 넘긴 그 물건이 도저히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이 이사한 날 이후 지금까지 일관하는 아내의 주장인 것이다.
내 눈으로 보기에도 그것은 그런 것 같았다. 화질 좋은 LED TV가 액자처럼 벽 가운데 가볍게 걸려 있으면 보기도 좋고 시청하기도 좋을 것 같다. 그런데 그런 다음에는 어떻게 할 것인가. 거기에 어울리는 받침대도 구입해야 할 것이고, 홈시어터 시스템도 갖춰놓아야 할 것이고, 편하게 영화 한 편 감상할 수 있으려면 푹신한 의자도 새로 마련해야 하지 않겠는가. 창문을 가리는 커튼도 최신식으로 뽑아야 하고, 조명도 간접조명으로 다시 다 바꿔놓아야 하지 않겠는가. 시청하다가 목이라도 마르면 콜라가 손에 있어야 하고, 입이 심심하면 팝콘도 계속 튀기고 있어야 하는 것 아니겠는가.
한창 떠오르는 장황한 생각들은 그러나 목에서만 달각거릴 뿐 아내 앞에서는 올라와주질 않는다. 아무래도 벽걸이 TV는 사야 할 것 같다.
“안방에도 침대” 운운하는 아내의 말이 장난이 아니라면 TV로 끝내는 것이 현명한 일일 터, 요즘 한창 한자 공부하는 아내에게 '견소왈명'이 무슨 뜻이냐고 그거 하나 물어본 다음 사는 쪽으로 결정을 내릴 작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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