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남·여'를 구분했던 유교적 사상은 사람들의 행위뿐 만 아니라 '남·여'가 함께 했던 건축물에서 외부형태와 내부구조를 바꾸기도 했는데 특히, 조선시대 양반가옥에서 여자의 공간인 '안채'와 남자의 공간인 '사랑채'로 구분하고 그 형태도 다르게 했던 것은 대표적인 '남녀유별(男女有別)'적인 건축사례다.
그런데, 조선후기에 우리나라로 들어왔던 서구문화의 개신교 교회건축에서도 이러한 남녀유별의 모습을 볼 수 있다. 당시 서구문화는 조선의 유교문화와는 다르게 남녀의 유별(有別)이 없고 여성의 지위가 상대적으로 높았지만, 유교문화의 나라에 전래되면서 그러한 모습을 따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전북 익산시 성당면 두동리에 있는 '두동교회 구본당'은 일제강점기인 1929년에 지어진 건물로 이러한 남녀유별의 모습을 아직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우리나라에는 다른 나라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ㄱ'자 형태의 예배당 건물이 몇 채 남아 있다. 대부분 일제강점기에 지어진 건물들인데, 그 이유는 조선후기 19세기 말에 개신교가 우리나라에 전래된 이후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우리사회는 급격히 서구화되기 시작하였고 그에 따라 남녀 간에 유별하였던 유교문화의 모습들이 사라지면서 일제강점기 이후부터는 'ㄱ'자 형태의 예배당 건물이 거의 지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 두동교회 |
우선 평면을 보면 ㄱ자 형태로 되어 있다. 평면도에서 보는 것처럼 남자석과 여자석은 직각으로 꺾여 있으며, 그 만나는 부분에는 휘장을 설치하여 남자와 여자가 서로 보이지 않도록 하였다. 출입구 또한 남자석과 여자석에 각각 하나씩 두어 예배당으로 들어올 때부터 남자와 여자는 서로 볼 수 없도록 조치되었다. 단지 강단에서 설교하는 목사만 남자와 여자석을 동시에 볼 수 있었다.
▲ 금산교회 |
이렇게 건축공간에서 남자와 여자를 구별했던 흔적들은 우리나라만의 독특한 시대적 상황을 보여주고 있어 역사적으로나 건축적으로 상당히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고 하겠으며, 이에 두 건축물은 문화재로 지정되어 보존되고 있다.
그리고 이전 호에서 예배당과 현대식 결혼식을 보면 강단이나 주례를 바라볼 때 남자는 왼쪽, 여자는 오른쪽이라고 했는데, 두동교회와 금산교회 평면도에서도 역시 남자석은 왼쪽 여자석은 오른쪽이다. 뉴스를 봐도 시청자의 시점에서 남자앵커는 왼쪽, 여자앵커는 오른쪽에 위치한다. 이러한 모습은 서구적 사상이 반영된 것이라 할 수 있는데, 서구문화는 기독교사상을 바탕으로 하고 있으며, 기독교에서는 하나님의 오른쪽, 즉 관찰자가 하나님을 바라볼 때 왼쪽이 오른쪽보다 위계가 높기 때문이다. /이희준 대전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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