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이석 대전시립교향악단 사무국장 |
그렇다면 이러한 시대의 공연장은 우리에게 과연 어떠한 의미를 던져 주는가?
누구나 공감하듯이 많은 문명의 이기(利己)는 우리에게 엄청난 편리와 실용성을 제공했다. 예술의 향수욕을 채우기 위해 옛날 바흐처럼 특별한 노력을 하지 않아도, 그리고 입장료나 교통비를 들이지 않아도 TV나 라디오, 인터넷을 통해 실황을 제공받을 수도 있다. 또한 어렵게 공연장을 찾아가서 불편한 공연장의 예절(정장하기, 공연 전에 좌석에 앉기, 생리적 현상까지도 자제를 요할 정도의 정숙하기, 박수 쳐야 할 때를 알기 등)에 강요받을 필요성도 없다. 가정에서 음반을 준비하고 혹은 대중매체를 통해 언제든지 우리가 하고 싶은 개인적 용무를 병행하면서 즐길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문명의 이기가 주는 유용성ㆍ편리성에 자기를 그대로 맡겨 버려서는 절대 안 된다. 이들이 은밀하게 우리를 잠식하는 유해성 및 소외 조장을 경계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대중매체는 전자의 순기능 못지않게 많은 역기능을 이 사회에 발휘하기 때문이다.
먼저, 대중매체로부터 제공받는 정보는 우리의 심미안을 길러 주지 못한다. 예술이 본디 인간 감정의 상징적인 형식이라면 예술에서 상징화되는 것은 일차적으로 인간의 정서와 감정들이다. 각각의 다른 정서와 감정에 의해, 즉 각자의 심미안에 의해 발견되는 정도와 형태가 다를 수 있다.
그러나 대중매체에서 제공하는 미적 제공 틀은 다르다. 따라서 대중매체에 의해 전달되는 예술은 '생 감상'에 반대 영향을 미치는 조장된 퇴행적ㆍ축소적 감상에 길들여진다. 다른 한편으로 이러한 문명의 이기들은 우리에게 '소외'를 조장한다. 창작활동과 감상활동이 어느 한 가지라도 독립된 형태로는 제 기능을 다할 수 없다. 창작 없는 무대활동이 있을 수 없으며, 무대활동 없는 창작, 무대활동 없는 청중, 청중 없는 무대활동 등의 의미는 예술활동의 실제가 서로 개별성으로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증명한다.
이러한 예술의 실제 중에서 오늘날 청중에 대한 비중은 다른 실제보다 훨씬 중요한 의미로 등장했다. 왜냐하면 그 옛날 특정 종교나 특정인의 전유물로서 대별되던 시대와는 달리 대중사회로 불려지는 오늘날 예술가의 생산물인 작품은 일단 작가의 손을 떠나면 특정인이나 특정 계급에 국한된 전유물이 아니라, 사회 일반 산물로서의 의미를 지닌다. 따라서 생산된 작품의 감상은 시간과 공간에 있어서의 동시적인 집단 경험을 필요로 한다. 골방에 홀로 앉아 감상하는 개인적 경험이 아니라 함께 미의식에 참여하는 동시적 집단성을 필요로 하는 것이다.
'소외'가 현대 사회를 대변하는 단어처럼 되어 버린 현대에 특히, 인간의 존재 체험을 함께 하는 문화의 동시적 집단 경험이 절실히 요구되는 것이다. 공연예술은 공연장에서 직접 체험하자! 그래서 개개인의 심미안을 높임으로써 첨가되는 공동체 사회성과 창의성을 이 사회에 확산시킬 필요성이 절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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