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순중 대전예총 사무처장 |
지난 오랜 기간 동안 우리나라에서 예술은 부의 상징이었다. 70~80년대에는 피아노학원이나 미술학원에 다니는 친구들은 소위 '있는 집' 자제들이었고, 지금은 흔하디 흔한 피아노도 그때는 재산목록으로 손꼽았던 시절이었다. 다들 먹고사는 것에 바빴기에 음악회에 가고 미술관에 가는 것은 사치에 불과했다.
그래서 예술을 아이들에게 접하게 한다는 것은 아직도 특권을 선망하는 부모들의 욕심으로 그려져 왔고, 이런 성향은 아이의 적성과 상관없이 성과를 남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주입하고 다그치는 예술 교육으로 변질되어 아이들의 예민한 감성을 키우기는커녕 오히려 더 멀어지게 만들어 버렸다. 교재에 맞춘 일방적인 교육과 개개인의 특성을 무시한 주입식교육은 학교나 학원이나 같았다.
이렇듯 현재 한국의 성인들은 한창 감수성이 예민할 때 억압과 압박 속에서 살아왔다. 감성이 무뎌진 어른이 되고 나서야 예술이라는 것을 접하게 되니 마음의 문이 쉽게 열리지 않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르겠다.
이제는 우리 아이들에게 강압적인 예술의 기교만을 가르치기보다는 즐기는 법을 가르쳐야 한다. '즐긴다'라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다. 세계 음악계에 큰 이름을 남기고 있는 한국인 음악가들은 주로 어릴 적부터 교회나 성당에서 음악을 자연스레 접해온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물론 교회나 성당에서는 성악이나 피아노 같은 음악교육이라는 것을 시키지 않았다. 그들에게 친구들과 어울려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는 것은 즐거운 그들의 일상들이었던 것이었다. 그들은 그들의 춤과 노래를 예술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냥 음악은 자연스러운 일상이었던 것이다. 이처럼 사전지식이 없어도, 음악의 아버지, 어머니가 누구인지 몰라도 충분히 즐길 수 있는 예술이어야 한다. 엘리트 예술교육이라기보다는 생활 속에서 예술을 즐기는 사람을 만드는 교육에 주안점을 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어린이들을 위한 문화예술교육 이것은 우주개발이나 대체에너지 개발보다 더 인류를 생각하는 일이며 신중하고도 중요한 일임을 기억해야 한다. 우리 사회의 미래 모습 또한 여기서 그려진다고 생각한다. 어른들이 좋은 인상파 그림을 보면서 감동을 느끼듯이 어린이에게도 그러한 감상과 감동이 가능하고 필요다고 인정해야 한다. 단지 어른과 다른 점은 스스로 무엇이 좋은지 알지도 요구할 줄도 모른다는 것이고 스스로 만들 수 없다는 것밖에 없다. 이것은 당연히 우리 어른들의 몫이다.
우리가 만드는 환경 속에서 자란 어린이들이 후일 세계를 한눈으로 바라볼 때에 우리에게서 물려받든 문화유산과 인간적 감성이 부끄럽거나 초라하게 느껴지기보다는 긍지와 감사를 느끼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면 어린이가 있는 사회의 모든 어른들은 어린이들에게 좋은 환경, 좋은 문화예술을 제공해야 할 사명과 의무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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