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홍진 한남대 문창과 교수 |
분단 이후 북한은 우리에게 공포와 연민의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타자다. 한쪽엔 체제 이데올로기의 이질감으로, 다른 한쪽엔 민족적 동질감으로 구성된 이 타자는 양가적인 심리로 우리를 이끈다. 공포와 연민, 적의와 환대, 이질감과 동질감, 낯섦과 익숙함의 정서가 그것이다. 천안함 사건에서의 적개심과 월드컵에서의 동정심은 이러한 심리적 메커니즘의 작동 방식을 잘 보여준다.
타자가 지닌 이질감이 적의의 대상으로 인식되면 이해도 순화도 불가능하기에 '에일리언' 같은 괴물로 표상되기도 한다. 이 괴물은 '우리'의 정체성과는 차이를 지닌 이상한 존재다. 이 이상한 두려운 낯섦(Uncanny)은 우리의 정체성과 결코 동화할 수 없는 존재로 악의 표상이다. '나'와 동일한 문법규칙을 공유하지 않은 이 타자의 환영은 항상 '나'의 정체성 또는 '우리'라는 커뮤니티에 현기증을 유발시킨다. 그것은 주체의 동일성을 위협하는 공포의 대상이다. 이때 타자는 어느 철학자의 말처럼 존재 그 자체가 악이다. 그래서 따끔한 채찍으로 훈육하고 징벌해야 된다.
그렇다고 우리가 북한이라는 타자를 공포와 위협의 대상으로만 간주하는 건 아니다. 가령 얼마 전 영화 '의형제'에서 그림자(전국환)와 송지원(강동원) 사이의 분열은 적대와 환대, 증오와 연민의 심리적 태도를 극명하게 드러낸다. 그림자의 표현을 빌리면 서로에 대한 이해는 한마디로 '감상적인 짓'에 불과하다.
북한에 대한 연민의 감정은 휴머니즘적 관점과 우리 사회보다 열등해서 동정을 받아야 할 대상이라는 관점에서 가능하다. 연민과 동정의 '감상적인 짓'은 이로부터 발원하는 듯하다. 우리는 북한이라는 타자를 우리보다 열등한 존재, 우리가 호혜를 베풀어야 할 미숙한 존재일 때 응원의 대상으로 '감상적인 짓'을 한다. 만약 타자가 미숙하고 미개하고 후진적이라 생각하지 않고 우리와 동일한 수평적 존재로 느껴진다면 과연 그 같은 태도가 가능할까 의문이다.
인간의 사유는 주체와 타자를 차이로 구분하기를 좋아한다. 이러한 구분에서 주체는 선을 자기 정체성과 등가시키고, 악의 경험은 우리 밖의 이질적 존재와 연결시킨다. 또한 차이의 구분은 주체의 우월과 타자의 열등을 전제한다. 천안함과 월드컵, 그 증오와 연민의 감정은 이러한 사유의 흔적일 게다. 그런데 타자에 대한 윤리는 타자를 대상화하지 않을 때에만 발생한다는 점이다. 그래서 타자를 배제와 차별, 연민과 동정의 대상으로 간주하지 않고 또 주체의 정체성으로 동일화하지 않을 때에만 진정으로 타자와 만날 수 있다는 언명은 경청할 만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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