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위가 상한 해당 아파트에서 판정을 의뢰해 살펴보니 새주소 도로명의 표기와 정확히 일치하고 있었다. 그분이 한때 지명위원이었던 터라 더 좀 연구하려던 불과 며칠 사이 도로명이 싹 바뀌어 써보기 전에 새주소는 '헌 주소'가 돼 버렸다. 황당했다. 어둑한 노래방에서 '화장을 고치고'를 들을 때의 왠지 모를 그 묘한 기분과 비슷했다.
사실, 우리가 살고 아이들이 태어난 마을이 길('로')이 된다는 것은 꽤나 문화적 충격이다. 그래서 생각나는 『여유당전서』다. 정다산이 '이(里)'는 귀하고 '동(洞)'은 풍속이 어그러진 천한 이름으로 쓴 뜻과 배경은 따로 있겠지만 심심산골까지 매달린 무슨무슨 '로'를 보고 느끼는 갓 쓰고 자전거 타는 듯한 감상과 유사하지 않았을까 한다.
'마을 리(里)' 자는 그대로 땅 위의 상형문자나 같다. 큰 길과 ㄱ자로 꺾이는 골목길과 필지들, 골목 입구에 버틴 문이 모여 '리(里)'다. 큰길과 갈림길, 갈림길 끝 옹기종기 마을이 모이면 면(面)이다. 면과 리와 동이 스스로 길을 품었는데 뚝 떼어내 길만 남았다. '어그러짐'이란 이런 것이지 싶다.
'도(道)'는 ―올레길처럼 기획된 길에선 머리와 다리가 같이 간다는 풀이도 통하겠지만― 원래 우두머리(首)가 무리지어 행차하는 길이고 '로(路)'는 뭇사람의 뭇발자국으로 다져진 길이다. 길, 도, 로가 너비나 차로(車路) 수로 재단되고 사전 놓고 짜낸 얼치기 작명에 표지판 몇백만 개를 생돈 들여 고쳐 단 일도 더는 함구하겠다. 본질은 지명이 역사라는 데 있다. 관들이 있어 관평동, 만년 동안 양식 걱정 없이 산다 해서 만년동이다. 백제가 망하고 신라 경덕왕 때 유성으로 개명해 1250여년 길이길이 내려온 것도 역사이며 본정이정목이 인동, 본정삼정목이 효동이 된 것도 역사다.
관평동으로 돌아가서, '테크노'에 '기술' 뜻이 있고 테크노밸리가 있다 한들 숨과 결이 우러난 이름은 결코 아니다. 입주민 85%가 '테크노'를 원한다며 바꾼다면 “아파트 이름을 띄우기 위한 동 명칭”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용인 경전철 '에버랜드역' 사례와는 또 다르다. 구의회 상임위원회를 넘은 조례안이 오늘 본회의를 거뜬히 넘어 테크노동 스트레스를 삽상하게 날렸으면 하는 바람이다. 아파트에 대한 예의가 있으면 지명에 대한 예의도 있는 것이다. /최충식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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