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이끼]“니는 신이 될라 캤나? 내는 인간이 될라 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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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이끼]“니는 신이 될라 캤나? 내는 인간이 될라 캤다”

■ 이끼 감독: 강우석. 출연: 정재영, 박해일, 유선, 유해진.

  • 승인 2010-07-15 16:53
  • 신문게재 2010-07-16 9면
  • 안순택 기자안순택 기자

 <줄거리>
 해국은 아버지 유목형의 부고 소식을 듣고 아버지가 머물렀던 마을을 찾는다. 이장 천용덕과 그를 따르는 덕천, 석만, 성규, 영지 등은 그에게 경계의 시선을 보낸다. 해국은 점차 아버지와 마을 사람들의 관계를 의심하게 되고, 자신 때문에 좌천됐던 검사 민욱에게 도움을 청한다.

 2시간 38분. 긴 러닝타임이 전혀 지루하지 않았다. KTX를 탄 듯 빠른 전개와 묵중한 무게가 느껴지는 드라마, 양파 벗기듯 벗길수록 생생해지는 미스터리, 처음부터 끝까지 가슴을 죄는 긴장감, 광기를 드러내는 인물들의 저돌적 에너지는 하품할 틈조차 허락하지 않는다. 마지막엔 호되게 뒤통수를 친다. 잘 짜인 이야기의 힘. 영화의 힘은 역시 좋은 이야기에서 나온다.

 윤태호 작가의 인기 웹툰 ‘이끼’를 강우석 감독이 영화로 만든다고 했을 때 사람들은 고개를 갸웃했다. 강우석이 누군가. ‘투캅스’ ‘공공의 적’에서 보듯, 메시지가 담긴 이야기를 유머를 곁들이되 선 굵은 리듬으로 호쾌하게 그려내는 감독 아닌가. 음습하고 음험한 ‘이끼’의 세계와 그는 뜻밖의 그림이었다.

네티즌들은 ‘박쥐’의 박찬욱, ‘마더’의 봉준호 감독에게 넘기라고 요구하기도 했다. 14일 공개된 ‘이끼’는 뚝심 있게 밀어붙여 자신의 스타일로 완성한 온전히 강우석표 ‘작품’이었다. 긴장감을 끝까지 끌고 가는 그의 탁월한 이야기 솜씨는 네티즌들의 우려를 깨끗이 씻어낼 만하다.
 
 △만화 대 영화
 이상적인 세계를 건설하려는 신의 대리자를 자임하는 자와 속세의 권력을 자임하는 자의 대결은 만화와 같다. 아버지 죽음 뒤에 가려진 비밀을 추적하는 과정에서 추악한 진실이 드러나는 줄거리도 같다. 암울한 정서도 그대로 가져왔다.

 하지만 짜릿한 공포는 제거됐다. 가슴을 죄어오던 시골 마을의 음습한 풍경도 없다. 백열등의 필라멘트가 끊어지던 찰나에 드러났던 광경, 4명의 남자와 1명의 여자가 뒤엉켜 있던 그 경악스런 이미지도 재현되지 않았다. 오프닝, 어떤 고난에도 신음소리 한 번 내지 않는 유목형에게 천용덕은 경외를 느끼고, 둘이 함께 구원의 낙원을 건설해보자고 제안한다. 천용덕과 유목형의 만남. 만화가 후반까지 꽁꽁 숨겨놓았던 가장 핵심적인 미스터리를 영화의 첫 머리로 삼은 것이다.

 영화는 이 미스터리를 포기하는 대신 인간 욕망의 드라마를 들려준다. 권력은 어떻게 생겨나고 어떤 수단으로 유지되는가. 따르는 자들은 무엇에 매달리는가. 이 과정에서 개인과 집단, 선과 악, 삶과 구원, 피해자와 가해자가 엇갈리는 복합적인 성찰의 이야기가 수근 댄다. 이를 위해 깡마른 만화의 인물들에게 인간적인 살을 입혔다. 기묘하다 못해 기괴했던 인물들에게 일상적인 모습이 덧칠됐고, 숨 쉴 틈 없는 원작의 긴장은 유머로 숨통을 틔웠다.
 
 △캐릭터 대 배우
 대머리와 번뜩이는 눈동자, 좁은 턱을 가진 악의 화신 천용덕을 예상치 못한 정재영이 연기한 것만큼이나 만화 속 캐릭터들은 탈바꿈하면서 입체화됐다.

천용덕은 손님에게 차를 따라주지만 혼자 있을 때는 콜라와 새우깡을 먹는다. 인물들의 일상적인 행동과 감정을 묘사하면서 웃음도 살아났다. 약의 힘으로 환영을 지우려했던 만화 속 덕천은 ‘백지’ 인물로 그려져 유머와 긴장을 동시에 품는다. 가장 큰 변화는 영지. 관능적이고 퇴폐적으로 그려졌던 영지는 사건의 열쇠를 쥔 밝은 여성으로 탈바꿈했다.

 ‘이끼’가 관객들에게 박수를 받는다면 그 첫 번째 공은 배우들에게 돌아가야 맞다. 정재영은 날카로운 느낌의 40대와 느물거리는 70대 사이의 변화의 진폭을 적확하게 잡아낸다.

박해일은 상대의 눈을 똑바로 보고 꼿꼿하게 걷는 것으로 선배들의 연기에 치열하게 맞선다. 압권은 역시 유해진인데, 덕천 역의 유해진은 권력에 기댄 자의 내면의 두려움을 유머로 위장했다가 막판에 폭발시키는 굉장한 에너지를 보여준다. 또 영화가 끝나고 나면 유선이 연기하는 영지 역이 가장 뇌리에 남는다.

 강우석은 이 연기 잘 하는 배우들에게 멍석을 깔아주되, 철저히 ‘강우석의 캐릭터’를 연기하도록 금줄을 친다. 그렇게 해서 ‘이끼’는 이야기의 힘과 배우들의 연기의 힘이 맞부딪혀 강렬한 에너지를 내뿜는 영화가 됐다. 한국 영화사에 기억될만한 불꽃이다. 영화를 보고 집에 가서도 곱씹게 만드는 영화, 씹으면 씹을수록 새로운 맛이 나는 ‘이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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