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언복]마을의 교육적 기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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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언복]마을의 교육적 기능

[목요세평]표언복 목원대 교육대학원장 국어교육과 교수

  • 승인 2010-07-07 14:15
  • 신문게재 2010-07-08 20면
  • 표언복 목원대 교육대학원장 국어교육과 교수표언복 목원대 교육대학원장 국어교육과 교수
우리 국민이 반드시 읽어야 할 작품 중의 하나로 꼽히는 이문구의 대표작 관촌수필은 지금의 보령시, 옛 한내읍의 갈머리라는 마을을 주된 공간적 배경으로 삼고 있다. 작가의 유소년기 체험이 중심 바탕을 이루고 있는 이 작품은 주인공이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서로 끈끈하게 연결돼 살아가는 이 마을 속에서 한 사람의 어엿한 어른으로 자라가는 모습을 그린 일종의 성장소설이다. 소설 쓰는 일을 초상화 그리기에 비유한 사람은 로브 그리예(A. Robbe-Grillet)였다.

그는 “소설을 쓴다는 것은 기왕의 초상화 전시장에 몇 개의 새로운 초상화를 더하는 것과 같다”는 말로 인물 창조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그래서일까 관촌수필에는 참 많은 인물들이 등장한다. 저마다 개성이 뚜렷하지만 한결같이 이 땅에 살던 옛사람 그대로의 모습들이기도 하다. 집 안에는 예로부터 전해 내려오는 전통적 유교관념에 사로잡혀 사는 할아버지가 있으며, 걸핏하면 집뒤짐당하고 붙잡혀 가기를 일삼는 사회주의자 아버지가 있다.

명문가 출신의 어머니는 예의 범절에 깍듯하고 계절음식이나 명절음식을 챙기는 일에 철저하다. 네 살 터울의 조카가 한 집안에서 자라는가 하면, 혈육이나 진배없는 '아랫것'도 있고, 꿩 잡고 비둘기 잡는 일에 고수인 머슴도 있었다. 이만만 해도 가히 '초상화 전시장'이라 할 만하지 않을까?

말할 나위도 없는 일이지만 이들이 함께 어울려 사는 갈머리 마을엔 한결 더 많고 그런만큼 훨씬 더 다양한 인물들이 어울려 살고 있었다. 피란길에 찾아들었던 이북출신 윤 영감네 일가, 무엇이든 절등(絶等)하게 잘 줍고 잘 잡아내는 손속있는 '대복이', 이념의 노리개가 되었다가 허망하게 무너져 내린 착하고 후더분한 처녀 '순심이', 전쟁의 광풍에 휘말려 굴곡진 삶을 살아낸 석공 '신현석', 게으르기 짝이 없으면서도 마을의 온갖 궂은 일을 도맡아 해 내는 징용자 출신 '복산 아버지'…. 주인공은 무수히 많은 이들 인간들 속에 묻혀 살면서 세상을 알고 인간을 배워 하나의 성숙한 인간으로 성장했다.

그의 한문 실력이 할아버지의 교육에 의한 것이고, 만만치 않은 서예 실력은 아버지의 영향이었다. 나이 따라 찾아 들어간 학교에서 얻고 배운 것 또한 적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어디 그뿐이었겠는가. 퍼내어 써도 써도 마르지 않는 샘처럼 한도 끝도 없이 퍼 올려진 작품 속의 그 현란한 토착어의 향연이 어찌 집안 교육이나 학교교육만으로 가능했겠는가.

산과 들, 강과 바다에 깃들여 사는 무수한 생명들의 그 무수한 이름과, 그보다 더 무수한 삶의 방식과, 그것들을 인간의 필요에 따라 적절히 얻어 들이고 이용할 줄 아는, 또 그 무수한 지혜와 방법들을 어찌 선생님과 교과서를 통해 다 배울 수 있단 말인가. 그는 훨씬 더 많은 것들을 이웃들을 통해 배우고, 훨씬 더 중요한 것들을 마을 사람들과의 일상 속에서 자연스럽게 터득해 갔다. 이를테면 작품 속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들이 다 그의 스승이었던 셈이다.

오늘날 우리 교육이 안고 있는 모든 문제점이나 역기능 현상들은 사실상 마을교육의 실종에서 비롯된 것이다. 아이들을 모두 마을로부터 몰아내어 교실 안에 가두고 학원 안에 밀어넣기 시작하면서 우리 교육은 빠르게 왜곡되기 시작했다. 아이들 교육을 마을 사람들로부터 격리시켜 선생님에게만 맡기면서 우리 교육은 구부러지기 시작하고, 놀이와 노동으로부터 차단시켜 교실 안에 가두어 두면서 우리 교육은 비뚤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단초는 할아버지·할머니, 고모·삼촌이 한데 어울려 살던 전통 가족제도의 붕괴현상이었다. 형제도 자매도 없이 자라, 어른이라곤 부모와 교사밖에 모르고, 이웃이라곤 또래친구밖에 없는 우리의 아이들이 배우고 터득할 수 있는 것은 처음부터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글이나 그림 속 현장은 어디까지나 허구일 뿐, 형식적인 체험학습을 열 번 백 번 다닌댔자 도로(徒勞)에 지나지 않는다.

지식의 축적이 교육의 전부라는 믿음은 더구나 어리석기 그지없다. 마을을 잃은 우리 아이들은 교육받는다기보다는 오히려 사육당하는 일에 가깝다. 좁은 교실이나 독서실 안에 갇혀 똑같은 책, 똑같은 영상자료에 기대어 천편일률적인 정보나 얻고, 부모의 욕심에 따라 길들여지는 우리 아이들의 현실이 축사 안의 가축들과 다를 것도 없다. 마을의 교육적 기능을 되살리는 일, 아이들을 이 마을 안에 되돌려 보내는 일이야 말로 교육의 순기능을 회복하는 첩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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