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를 잃고 방황하던 정윤은 복학 후 첫 교실에서 명서와 미루를 만난다. 첫 만남부터 끌렸던 세 사람은 줄곧 함께 지내게 된다. 명서와 미루는 어린 시절부터 함께 자란 친구로 서로 의지하고 돌봐주는 사이였다. 미루는 언제나 잔꽃무늬 플레어스커트를 입고 다녔는데 화상 입은 손을 주머니에 감추고 있었다. 정윤에게도 어린 시절 함께 지냈던 단이라는 남자친구가 있었다. 그림을 그리던 단이는 대학의 혼란스러움에 적응하지 못한 채 서둘러 입대를 하게 된다. 그러는 사이 정윤과 명서 사이에 서서히 사랑이 싹터간다.
그 후 혼자 고립되어 있던 미루의 곁을 명서가 지켜주었다. 반지하의 컴컴함 방으로 이사를 간 미루의 창가에 수많은 백합뿌리를 심어주면서. 그리고 정윤과의 만남이 미루에게 고통의 상처를 걷어내 주기를 기다리면서. 미루가 정윤에게 예전에 언니와 살던 집에서 함께 살자고 할 때 그들의 상처는 회복될 수 있을 것 같았다. 엄마를 잃은 정윤과 엄마 보다 큰 존재였던 언니를 잃은 미루는 그런 면에서 서로를 이해해 줄 수 있는 상대였으니까.
하지만, 함께 살기로 했던 집이 갑자기 팔리면서 미루는 부모님과 거칠게 싸우게 된다. 그후 사라진 미루는 외할머니 댁에서 모든 음식을 거부한 채 자살하고, 단이도 군대에서 원인 모를 총기사고로 목숨을 잃었다는 소식이 전해진다. 사랑하는 사람들을 잃은 정윤은 명서에게 함께 지낼 것을 제안하지만 명서는 함께 있으면 아프고 흉측하게 될 거란 말만 남기고 떠난다. 그리고 그때 태어났던 아기가 청춘을 맞이할 만큼 많은 시간이 흘러서 그들은 다시 만나게 된다.
신경숙은 이 책이 사랑에 대한 책이며 청춘소설이 되기를 바란다고 했지만 죽음에 대한 이야기가 많아서 읽는 내내 마음이 무거웠다. 하지만 청춘이 눈부시게 찬란한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지나온 사람들은 알 것이다. 사랑의 기쁨과 상실의 고통을 통과하면서 힘겹게 마음의 나이테를 쌓아가는 모습이 어쩌면 청춘의 아름다움일 수도 있다는 것을. 그리고 서로의 아픔을 외면하지 않고 사랑으로 다가서는 모습이 청춘의 힘이라는 것을. “내가 그쪽으로 갈게.” “우리 오늘을 잊지 말자”고 늘 약속하고 다짐했던 명서와 정윤처럼.
책 속에서 크리스토프란 인물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강가에 살았던 크리스토프는 배도 없이 맨몸으로 사람을 건네주는 뱃사공이었다. 그는 어린 아이로 변한 그리스도를 어깨에 태우고 강을 건넜다고 한다. 그러니까 그는 이 세상 전체를 짊어지고 강을 건넜던 성인인 것이다. 우리는 크리스토프로 살고 있을까? 아니면 등에 업힌 아이로 살고 있을까?
책을 덮으면서 나를 찾는 전화벨이 울린 곳은 고통 때문에 더욱 아름다웠던 청춘의 어느 한 때였음을 알 것 같았다. 정윤과, 명서, 미루와 단이, 이 네 사람이 만났던 청춘. 사랑했지만 함께 있음으로 인해서 상대를 힘겹게 할까봐 서로에게서 떠나가야 했던 시절. 청춘의 상처와 불안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것 같아 책에서 손을 놓을 수 없었다. 어쩌면 청춘은 시간에 따라 흘러간 것이 아니라 어느 순간에 멈춰서 기다리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정윤이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 수화기를 통해 들려온 명서의 목소리를 단번에 기억해 내듯이. 내 청춘의 기억들이 나를 찾는 전화벨 소리가 울리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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