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실한 목사 주영수의 5살 난 딸 혜린이 유괴됐다. 영수와 아내의 간절한 기도에도 불구하고 혜린은 끝내 돌아오지 못했다. 가정은 파괴되고, 영수는 딸을 지키고 보호하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피폐해 간다. 8년 뒤, 죽은 줄 알았던 딸의 목소리가 전화기 너머로 들려온다.
올해 초에도 아버지는 피눈물을 흘리며 거리를 헤맸다. 잃어버린 딸을 찾기 위해서였다.(영화 ‘용서는 없다’) 올해뿐인가. 2007년엔 유괴된 아들을 찾기 위해 눈물로 호소했고(‘그놈 목소리’), 여류 변호사는 유괴된 딸을 살리기 위해 7일 동안 ‘목소리’의 지시대로 움직이며 ‘최악의 협상극’을 벌였다.(‘세븐 데이즈’) 유괴 살인으로 아들을 잃은 어머니가 어떻게 파괴되어 가는지를 절절하게 그려낸 ‘밀양’은 세계인이 공감을 샀다. 그 앞엔 박찬욱 감독의 ‘친절한 금자씨’, 또 그 앞엔 ‘복수는 나의 것’이 자녀를 잃어버린 파괴된 가정, 파괴된 아버지를 아프게 보여줬다.
2000년대 들어 유독 어린이 유괴와 파괴된 부모가 등장하는 스릴러가 양산되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지금 우리 사회에서 가장 큰 공포는 갑자기 아이들이 사라지는 것이며, 사회적 분노가 어린이 유괴와 어린이를 대상으로 한 성폭행에 집중되어 있다는 증거일 것이다.
‘파괴된 사나이’는 딸을 유괴당한 아버지의 영화다. 다른 ‘유괴영화’와 다른 점은 유괴범을 추적하고 밝혀내며, 응징하고 딸을 구해낸다는 것, 한국판 ‘테이큰’인 셈이다. 그런 줄거리라면 범인을 쫓는 아버지의 활약상이나 범인과의 날 선 대결을 기대할만하다. 그러나 영화는 전혀 다른 선택을 한다. 제목에서 보듯 자식을 잃는다는 게 얼마나 한 개인을, 가족을 피폐하게 만드는지를 그리는 데 집중한다. 주인공이 목사라는 설정도 파괴된 인물의 모습을 극대화하기 위한 장치도 작동한다.
그런 선택이 옳은지는 의문이다. 아마 배우들의 연기에 방점을 찍은 관객이라면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울 것이고, 서스펜스 스릴러로서 서사적 짜임새에 중점을 둔 관객이라면 손가락을 아래로 내릴 것이다.
김명민의 연기는 “역시”라는 감탄사를 자아낸다. 딸의 흔적을 찾아 5일 밤을 PC방에서 지새우는 장면을 찍기 위해 실제 3일 밤을 새우는 열의로 극중 인물과 하나가 됐다. 엄기준의 유괴범 연기도 좋다. 직접적인 잔혹한 장면이 없음에도 분위기와 눈빛으로, 선한 미소 뒤에 숨겨진 잔인함으로 관객들의 뒤통수를 친다. 여기에 ‘올 누드’로 파격적인 노출까지 보여준다. 이런 멋진 연기라면 아버지와 유괴범의 대결 쪽으로 가는 게 훨씬 나을 뻔했다.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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