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영진 중도일보 前 주필 |
소련 탱크를 앞세운 인민군은 3일 만에 서울에 침입, 중앙청에 인공기를 달았고 파죽지세로 남하해 대전에선 시가전까지 벌였다. 미 24사단장 딘 소장이 포로가 된 것도 이때 일이었다. 불과 2개월여 만에 대구·부산을 제외한 남한 일대는 그들 천하였다.
3년 남짓의 전쟁기간 이 강토는 초토화 돼버렸다. 그야말로 미증유의 전쟁이었다. 휴전은 1953년 7월 27일에 성립되었다. 이때 이승만 대통령은 휴전을 결사반대했고 맥아더는 원자탄을 중국에 투하할 계획까지 세우고 있었다. 그러나 트루먼·스탈린 양 수뇌는 한국전이 자칫 3차 대전으로 비화될까 우려해서 정전에 합의한다.
전쟁 피해를 간추려 보면 한국군과 유엔군 전사자는 18만 명에 부상자 40만 명, 남북한 민간 피해자 약 100만 명, 인민군 전사자는 52만 명, 중공군 90만 명(사상), 북한을 탈출한 피란민은 300만명(북한인구 1200만명)으로 1000만 이산가족을 냈다. 반면 의용군을 포함한 자진 월북자는 29만 명, 남쪽의 재산피해는 물경 4100억 환(당시 화폐기준)을 추산한다.
하지만 남한은 당시 80달러이던 소득이 오늘날 2만 달러 시대를 누리고 있어 20세기 가장 모범 국가라는 칭송을 받아왔다. 스포츠와 경제, 문화, 예술 분야는 선진권을 달리고 있으나 안타깝게도 정치 분야에선 이를 따르지 못한다는 평들인데 여기서 민주시민의 '세련미결여'를 자탄하는 막스 베버의 말이 떠오른다.
민주제도란 '타협과 조화'를 본령으로 삼는다면서도 우리의 정치사는 줄곧 얼룩무늬의 점철 그것이었다. 오만과 독선, 패거리 정치의 반복이었다. 그러다 보니 국론분열, 비생산적인 쟁투를 일삼기 일쑤였다. 예를 들면 서해 천안함 사건을 놓고도 북측의 주장에 동조하는 부류가 있어 우리는 할 말을 잊는다.
또 6·25가 북침이라는 평양 측 선동에 놀아나는 이가 있다니 이게 될 말인가. 중국마저 6·25는 북한의 남침이라 공언하는데도 북침이라 한다면 이게 어디 제정신인가. 주적(主敵) 개념을 놓고도 모호한 풀이를 하는 지성들을 보아왔다.
'전쟁은 국민의 건강을 드높이고 역사의 진전을 촉진시킨다'는 공산당 이론은 아직도 서슬이 퍼렇다. 6·25 이야기를 하자면 끝이 없다. 필자는 백마산 전투 때 수색에 나섰다가 숲속으로 기어가는 중공군 병사를 발견, 이를 생포했다. 총은 버렸는지 없었고 방망이 수류탄을 갖고 있는 걸 덮쳤다.
그는 가슴에 붉은 휘장을 달고 있었다. 항미원조(抗美援助)라고…. 미국에 항전하고 조선을 돕는다는 의용군 기장이었다. 그는 MIP(중공군 포로심문반)에 넘겨졌고 그 바람에 필자는 화랑무공훈장을 받고 휴가를 받았다. 그래서 '국가유공자'라 해서 지금도 달마다 얼마간의 금액이 보훈처로부터 지급된다.
하지만, 6·25와 월남전에서 산화한 영령들을 생각하면 송구하다는 생각을 한다. 용케도 살아남아 이 날에 이르렀으니 여한이 있을 리 없고 더 이상 무슨 욕심을 부리겠는가. 전쟁이 할퀴고 지나간 상흔(흠집)은 곳곳에 남아 얼룩져 있다.
국토의 분단과 남북 간의 갈등 역사와 혈통 정서면까지 상처를 입힌 전쟁이었다. 이제는 이를 치유할 방법과 수단을 생각하고 살아가야 할 예지도 창출해야 한다. 어떻든 '6·25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절감하는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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