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호택 국제로타리 3680지구 총재 |
남아공 월드컵으로 우리는 잠을 설쳤다. 그리스를 격파하면서 시작한 태극전사들의 선전은 온 국민을 열광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다. 2002년 한일월드컵에서 이탈리아를 격파하고 대전월드컵경기장이 무너지지 않을까 싶을 정도의 응원단 함성속에는 나와 가족들이 함께 있었다. 그리고 정말 운이 좋게도 홈 어드밴티지로 100년에 한 번 있을까말까 한 역사적인 자리에 참여했다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이것이 운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2006년에는 아쉽게도 16강 진출이 좌절됐지만 선전을 했고, 이제 남아공에서 큰 일을 해내고 있다. 그렇지만 이런 큰 성과를 거둔 이면에는 월드컵에 처음 출전한 우리선배들의 피와 땀이 있었기에 가능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1954년, 6·25 전쟁의 고통이 아직 끝나지 않은 시기에 기적적으로 출전권을 따낸 한국팀은 일제 치하에서 조선 민족의 '축구 영웅'인 김용식씨를 감독으로 팀을 짜서 대망의 첫 출전을 한다. 당시만 해도 교통편이 열악해서 미군 군용기로 도쿄까지 간 다음 프로펠러로 나는 프랑스 여객기를 타고 스위스에 도착했다고 한다. 지금과 비교하면 키가 아주 작았던 우리 대표팀은 20시간의 비행 중에 발이 땅에 닿지 않아 축구선수의 생명인 허벅지 근육이 의자에 눌리는 고생을 했다. 비행기 도착 시각도 맞출 수가 없어서 시합 시작 몇 시간 전에 경기장에 간신히 도착했고, 설상가상으로 처음 만난 상대가 당시의 가장 강력한 우승후보인 헝가리였다. 헝가리는 비록 결승전에서 서독에게 패배하기는 했지만 세계 최강의 전력을 갖고 있다는 객관적 평가를 받던 팀이었다.
'대포알 슈팅'으로 유명했던 헝가리팀의 스타 '푸스카스'는 그 슛을 한국팀에 퍼부었고, 죽을 힘을 다해 뛰던 우리 선수들은 쥐가 나서 그라운드에 쓰러졌다고 한다. 후에 국가대표 감독까지 지낸 골키퍼 홍덕영 선수는 어쩌다가 공이 골대를 맞히면 천둥치는 소리가 났다고 했다. 그리고 경기가 끝나자 수많은 슛을 가슴으로 막아낸 탓에 너무나 가슴이 아팠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경기결과는 9-0. 아직도 월드컵에서 9점 차이의 패배 기록을 깬 팀은 없다. 우리는 그 참패를 치욕이라고 생각하면 안 된다. 우리 선배들의 피눈물나는 고생이 있었기에 오늘의 박지성이 있고, 오늘의 한국 태극전사가 있다고 생각해야 한다.
그렇지만 우리가 월드컵 경기에 열광하면서, 그리고 온 가족이 모여 맥주 한 잔 으로 환호하면서 그 분들의 노고를 기억하는 사람은 몇 명이나 될까?
중도일보(www.joongdo.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