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 의사의 호칭에 관한 논쟁도 이어졌었다. 안중근 의사를 높여 받드는 것에서라면 호칭을 달리 붙여 부른다고 해서 달라질 것은 없을 것 같다. 더구나 지금 중요한 것은 그런 것이 아니다. 광복이 되거든 당신의 뼈를 조국으로 가져가 묻어달라고 했던 최후 유언을 100년이 다되도록 받들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 통탄스럽기만 하다. 유해발굴에는 혼신을 다하지도 못했으면서 그런 점에 매달린다는 것은 본말이 전도 된 것이나 다름없을 뿐이다. 단순한 마음의 추모야 무슨 큰 의미가 있겠는가.
다행히 한·중·일 합동으로 안 의사의 유해 발굴 작업을 해나가기로 한 것은 매우 고무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다소 많은 시간이 걸리더라도 한 점 소홀함 없이 이행되어야하며 반드시 유해를 찾아 우리 땅에 반장해야하는 엄중한 과제가 우리 모두에게 주어져있다.
안중근 의사의 의거는 장엄한 민족정신과 평화사상의 발로였다. 그것은 3·1운동과 임시정부수립 그리고 윤봉길, 이봉창 의사 등의 의열 투쟁으로 이어지는 단초가 되었다. 강직한 모습과 유묵에 찍혀있는 단지, 하얼빈 역의 총격, 여순 감옥에서의 옥중투쟁 그리고 죽음 앞에서도 초연했던 면모가 자꾸 떠오른다. /박해완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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