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얼마 전 한 사설교육기관에서 시(詩)에 관한 강의를 하면서 “시를 읽는 사람보다 쓰는 사람이 많다”고 말문을 열었단다. 그러나 며칠 뒤 이창동 감독의 영화 '시'를 보았고 그제야 투덜거리며 시작한 이전 강의를 후회했다고 한다. 다시 기회가 생기면 이렇게 말하고 싶단다. “시를 쓰는 사람은 많지만 시를 쓰는 사람은 거의 없다.”
▲ 김재영 충남대 언론정보학과 교수 |
난 이번 선거를 지켜보면서 “선거는 있지만 선거는 없다”고 느꼈다. 도리어 선거 때문에 참으로 오랜 만에 '북풍'이란 게 등장했고 또 그게 먹혀들어 21세기 이 땅은 전쟁 위기감에 휩싸였다. 그 바람에 세종시 문제와 같은 우리 지역 현안을 비롯해 한때 선거판을 달궜던 무상급식 등 민생 이슈들이 모두 실종되었다. 이 마당에 누가 지역일꾼이자 수장으로 적임자인지 어찌 판별할 수 있을까.
우리는 선거를 흔히 '유권자의 축제' 또는 '민주주의의 꽃'이라 부른다. 이 둘은 '주권재민' 원리에서 비롯한 사실상 같은 말이다. 한 나라의 주권이 생성되는 근간인 국민이 스스로 대리인을 선출하는 행위이기에 모든 주도권은 유권자가 쥐어야 마땅하다. 의제도 정당이나 후보자가 내놓는 게 아니라 우리가 끄집어내고 공론화해야 정상이다. 이번 선거는 그럴 만한 틈새를 허용치 않았다. 북풍은 이 모든 걸 빨아들인 블랙홀이 되었다. 그래서 축제는 열리지 않았고 꽃은 피지 못했다.
문학평론가 신영철씨에 따르면, 이창동 감독은 영화를 통해 시를 다시 정의하려기보다 우리가 잊어버린 시의 본래 정의를 환기하고자 했다. “시는 진실 혹은 진심과 더불어 써야 한다는 것. 너무나 당연해서 대개 다들 잊어버렸고 이제는 오히려 우스워진 그 정의”를 말이다. 그렇다면 더 이상 축제도 꽃도 아닌, 그래서 무의미한 형식적 절차로 전락한 선거의 본래 정의를 되찾는 길은 무엇일까.
1988년 국회의원 선거 때 길을 가다 우연찮게 마주한 선거벽보를 보고 가슴이 뛰었다. 노란색과 검정색이 선명하게 조합된 그 벽보에는 이런 글귀가 쓰여 있었다. “하늘이시여 이제 진정 의로운 자가 말하게 하소서.” 당시는 1987년 6월 민주화 항쟁의 열기가 채 가시지 않은 때로 민주주의 자체가 절실한 과제였다. 따라서 민주주의는 거창한 담론일 수밖에 없었다. 이 벽보를 만든 해직교사 출신 저항시인은 여론조사 예측과 달리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었다.
이후 민주주의는 최소한 형식적, 제도적인 면에서 모양새를 갖추어 나갔다. 그러나 경제위기 등을 거치는 사이 민주주의는 더 이상 획득하고 지킬 대상이 아니라 이미 주어진 향유의 객체로 전락했다. 지금 추세대로라면 민주주의는 나와 상관없는 유산으로 박제화될 가능성도 있다. 오죽했으면 김대중 전 대통령이 서거 두 달여 전인 지난해 여름 6·15 남북정상회담 9주년 기념식에 휠체어를 타고 나타나 민주주의를 위해 행동하는 양심이 되자고 사력을 다해 호소했을까.
실상 민주주의는 거대하면서도 미세한 생활정치의 영역이다. 보이게, 때론 보이지 않게 우리의 삶을 지배하고 관통한다. 내가 숨을 쉬고 말을 하고 밥을 먹고 돈을 벌고 가족과 시간을 보내는 일. 우리 아이가 성장하면서 꿈을 품고 자아를 실현하는 그 모든 일상을 규정하는 게 민주주의다. 그래서 선거에 절망해도 민주주의에 대한 희망까지 포기할 순 없다.
시를 원래 자리로 원상 복귀시키기 위해선 이창동 감독 하나로 역부족이다. 칸 경쟁부문 출품과 함께 개봉한 영화 '시'의 관객은 2주 동안 고작 12만 명에 불과하다.
민주주의도 어느 한 사람의 노력으로 성취되지 않는다. 한 사람 한 사람으로 이루어진 우리의 몫이다. 선거일이기 때문이 아니라 민주주의를 위해 투표하자. 주어진 권리이기 때문이 아니라 자기가 꿈꾸는 인생을 자기 의지대로 살기 위해 투표장에 가자. 투표는 후보자 중 한 명을 선택하는 행위가 아니라 우리 손으로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첫 걸음이다. 로또에 당첨되고 싶으면 일단 로또부터 사야 하지 않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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