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윤희 대전둔천초등학교장 |
계산 앞에 원시인이 될 때는 또 있었다. 그것은 승진 점수를 가릴 때였다. 교원의 승진 점수는 소수 넷째자리까지 쓰이게 되는데, 나는 복잡한 계산에 멀미를 느끼면서 꼭 이러한 시스템만이 공정한 인사에 대입될 수 있는지 의문을 갖고는 했다. 각종 모임에서도 나는 요주의 인물이다. 시간 뿐 아니라 날짜까지 착각하고는 약속장소에서 혼자 두리번거리는 것이 예사이기 때문이다. 내일이 없는 삶. 리스트가 없는 사람에게 가장 무의미한 것이 계산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나는 궤도를 이탈한 사람이 분명하다. 그것은 타고난 DNA 영향도 있겠지만, 페시미즘의 오류도 적지 않다고 되돌아본다. 나는 6·25 전후 시대를 휩쓴 염세주의 문학에 조숙하게 빠져들었던 것이다. 주관이 지나치면 '망상'이 된다고 했던가.
나는 우리나라가 전쟁이 일어날 것이라는 생각도 늘 염두에 두고 살았다. 우리가 어렸을 때는 운동장에 모여앉아 노래 연습을 많이 했다. 유월이 되면 땡볕 아래서 현충일 노래나 6·25 노래를 줄기차게 불렀다. 운동회 때는 태극기를 휘날리면서 매스게임 하는 시간이 길었고, 화생방 공습 연습 때는 비닐을 뒤집어쓰고 바람 부는 반대방향으로 엎드려 숨을 몰아쉬곤 했다. 천둥소리까지 대포소리가 아닐까 착각할 만큼 나는 그렇게 전쟁에 민감하게 살았다. 더구나 글짓기 선생님으로 반공글짓기나 웅변대회에 대비하여 북한에 대한 시사를 스크랩 했고, 때로는 발을 구르고 땅을 치면서 북한을 규탄하는 시범을 보이기도 했다. 한번은 남북 정상회담이 열린다고 해서 원고 내용이 한층 희망적으로 고양되었지만, 갑자기 김일성이 사망하는 바람에 황급히 내용을 수정한 적도 있었다.
그 때처럼 지금 우리나라는 한치 앞을 모르는 상황이 되고 말았다. 과거로의 회귀라는 말들이 난무하고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제자리로 돌아온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동안 우리나라의 국력은 세계의 이목이 집중될 만큼 성장했고, 글로벌 시대에 맞게 많은 국가와 파트너가 되면서 슬픔과 고통도 나누게 되었다. 나 역시 예전의 나는 아니었다. 세상에 대한 알레르기는 자연스럽게 치유되었고, 이제 행복 바이러스를 전파해야 하는 위치가 된 것이다. 결국 나도 위기를 맞으면 맞을수록 강한 질경이 같은 한민족의 유전자를 가졌음이 분명하다.
“겨레와 나라 위해 목숨을 바치니 그 정성 영원히 조국을 지키네. 조국의 산하여 용사를 잠재우소서. 충혼은 영원히 겨레 가슴에. 임들은 불멸하는 민족혼의 상징. 날이 갈수록 아아 그 충성 새로워라.”
이 노랫말 하나하나가 새롭게 다가오는 것은 며칠 전 대전국립현충원에 모신 46명의 용사 때문이리라. 올해는 아이들과 함께 어느 해 보다 경건하게 현충일 노래를 부르고 싶다. 함께 어느 해 보다 경건하게 현충일 노래를 부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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