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슷한 해프닝을 요 며칠 전 나도 체험했다. 집에서 손수 도색작업 중간에 페인트 한 통을 사러 나갔는데, 얼굴과 옷에 얼룩범벅인 낯선 '페인트공'의 출현에 이 계통에 발 넓은 주인도 코를 큼큼거렸다. 태평하게 바둑 삼매경인 주인보다는, 내가 봐도 내가 더 페인트가게 주인 같았다. 사람 일이란, 얼마 상관 아니다.
어른이 되고도 물리도록 접하는 '신데렐라', '백설공주', '인어공주', '잠자는 숲속의 공주'(원전은 차례대로 '재투성이', '새하얀 눈아이', '물고기 아가씨', '가시장미 아이')를 보자. 일례로, 현실에서든 동화 속이든 신데렐라가 빛나는 옷 아닌 지저분한 궁상으로 왕자 마음을 사로잡기는 불가능하다. 민담 '원님의 옷', '나무꾼과 선녀', 귀족풍의 옷 덕에 가난뱅이 재단사가 미목수려한 아가씨와 연애한다는 '옷이 날개', 공주가 몸종노릇 하고 몸종이 공주노릇 하는 '거위 치는 하녀', 왕자와 거지의 신분이 엇바뀐 '왕자와 거지'가 하나같이 옷으로 사건이 빚어진다.
“우리가 옷을 입는 방식은 우리가 만나는 사람들에게 상당한 영향을 미치며 그들이 우리를 대하는 방식에도 크게 영향을 미친다.” '성공을 위한 옷(Dress for Success)'의 표현을 우리는 수도 없이 재연하며 산다. 잿빛 옷 입고 부엌에 가면 부엌데기 되고 캐주얼을 입으면 마음이 '캐주얼'해진다. 악마는 왜 프라다를 입는가. 프라다와 지미 추, 부뜨시나, 마놀로 블라닉과 같은 명품을 걸친 앤드리아는 명품 스타일리스트로 거듭난다. 정체성인가 하면, 영혼조차 옷이다. 고승이 넘겨주는 밥그릇과 옷은 법통(法統)이라는 함의가 있다.
퇴근길이다. 구의원 후보 부인을 자처하는 운동원이 명함을 건네며 “목사님이시죠?”라고 묻는다. 꼬락서니를 스스로 관찰하니 둥근 칼라와 정장에 가방. 서점과 미장원을 몰아 들러서인지, 미장원 원장은 대학교수로 아는 눈치다. 75세 꽃집 할머니는 공무원으로 지레짐작한다. 내 옷이 권력의 냄새를 풍겼다면 내 불찰이다. 용 문신을 드러낸 조폭들은 사우나에서 옷 벗은 내 눈치를 본다. 나를? 누구로 알기에?
옷은 날개, 신은 바퀴. 행랑이 몸채노릇. 고정관념을 벗고 입고 싶은 옷이 있다. 내가 누군지 침묵해도 좋을 옷. 소비사회의 자기중심성과 대척점의 타인지향성, 그 지독한 역설을 안 따져도 될 옷. 7첩·9첩반상 산해진미라도 매일 먹으면 질리는데, 매일 입어도 싫증을 모르는 옷. 페르시아 양탄자의 무늬처럼 의미 없는 옷이면서 '날개' 이상의 의미를 획득한 옷. /최충식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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