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는 법정스님의 글빚을 이해하기 어려워 하셨다. 아무리 무소유를 강조한다고 해도, 요즘같은 시대에서 무소유라는 것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만일 글빚이 싫다면 그 책을 판 금액으로 불우이웃을 돕는 자비로운 일을 하는게 더 옳은 일을 하는 것이라는 게 엄마의 지론이었다.
‘무소유’라는 것이 본래무일물이라는 것으로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소유한 것이 없다.’라는 것인데, 물론 법정스님 말씀대로 무언가를 소유하게 되면 그 소유물에 대한 집착으로 눈을 멀게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소유욕은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사회와는 정말 뗄 수 없는 단어가 아닐까 싶다. 법정 스님은 3년간 기른 난초를 소유욕과 집착 때문에 처분하곤 홀가분해졌다고 하지만, 지금에 내게는 그렇게 처분해야 하는 게 셀 수 없을 만큼 많다. 그리고 그것을 처분해버리면 살아갈 수 있을지도 의문이다. 내가 과연 소유한 모든 것을 처분한다면 홀가분해질까? 란 생각이 들었는데, 아마도 법정스님이 말씀한 적절한 의미는 지나친 과욕이나 소유욕을 말한 것이리라 생각이 된다.
나도 한때 소유했던 물건에게 집착을 했었고, 후엔 그 물건으로부터 내 자신이 지배당하고 있는 상황에 다다른 적이 있었다. 하지만 조금만 나를 떠나 일정한 거리를 두고 그때의 내 자신을 돌아본다면 알게 될 것이다. 내 스스로 이 세상에 하나의 존재로서 태어났을 때부터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은 존재였고, 결국 죽음이라는 운명적 삶의 끝에서도 어떠한 물건을 가지지 않은 채 떠나야 하는 존재라면 그 하나하나의 물건에 집착한다는 것 자체가 너무나 어리석었다는 것을... 그 느낌을 이 책을 보면서 하게 되었다. 그제서야 법정스님 말씀에 ‘집착은 괴로움이다.’라는 구절이 이해가 가기 시작했다.
법정스님이 말씀하신 또다른 책에선 ‘풍요는 사람을 병들게 하지만 맑은 가난은 우리에게 마음의 평화와 올바른 정신을 준다’라는 구절이 있다. 여기서 ‘맑은 가난’의 정확한 뜻이 무엇일까? 나만의 방법으로 ‘맑은 가난’을 재해석해 보자면, 흔히들 가난을 생각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구절이 ‘가난에 찌든’일 것이다. 이 ‘찌든’의 의미는 가진 것이 없어 힘든 이란 의미로 해석이 될 수 있다. 그렇다면 무소유도 가지지 않은 것인데 왜 ‘찌든’이 아닌 ‘맑은’인걸까 생각을 해 보면 무소유는 내가 소유를 하고자하면 가질 수 있으나, 마음속에 있는 욕심을 버리는 것이기 때문에 몸과 마음이 편안해지는 가난이 되는 것이기 때문에 ‘맑은 가난’이라는 표현을 쓴 것 같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는 물질만능주의.. 그리고 외모지상주의의 시대이다. 그리고 나는 그 안에 살고 있다. 친구들과 대화 할 땐 상욕도 섞어가며, 이 사회에 잘 적응한 한 사람으로 살고 있지만 아름다움과 성품은 꽃이 스스로 피듯 사람도 마음이 아름다워야 한 다는 것을 다시 한 번 깨닫게 되었다. ‘녹은 그 쇠를 먹는다.’ 는 책의 말처럼 내안의 모든 마음이 먹히기 전에 되돌아 볼 수 있어서 좋은 시간이 되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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