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혼한 딸이 맡기고 간 중학생 손자와 함께 살아가는 60대 할머니 미자. 레이스 달린 옷과 모자를 즐겨 쓰고 꽃을 좋아하는 아름다움의 세계에 속한 사람이다. 문화 강좌에 등록해 시를 배우는 미자. 그때 손자가 자살한 여중생의 집단 성폭행에 가담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어느 소도시에서 십대들이 여중생을 집단 성폭행한 사건이 일어났다. 이창동 감독이 영화 ‘밀양’을 준비하고 있을 때였다.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그는 복잡했던 심경을 들려줬다. “나는 굉장히 당황했다…무슨 존재나 삶의 구원 이전에 훨씬 현실적인 사건이 일어났는데 굳이 그걸 외면하고 존재론에 대해 영화를 만들어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연출부들하고 이야기를 많이 하고 잠시 영화를 엎기도 했다. 그러다가 결국 그냥 ‘밀양’을 하게 됐다. 그러니까 내게는 그 이야기에 대한 빚이 있다.”
그런데 그 이야기에 하필 시(詩)가 필요했을까. 영화 속의 시인은 “시를 쓴다는 건 아름다움을 찾는 일이다. 우리 눈앞에 보이는 것들, 이 일상의 삶 속에서 진정한 아름다움을 찾는 거다”라고 가르친다. 아름다움을 찾는 시와 전혀 아름답지 않은 몹쓸 짓 사이엔 어떤 연관이 있는 것일까. 이런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건 아닐까. 먹고 사느라 애면글면 바둥거리고 풍속 찜쪄먹을 정도로 득달같이 변하는 세상 속에서 감성조차 직접적인 재미만 좇는 강퍅하게 메말랐을지라도 시가 있어야 여린 감성을 어루만져줄 수 있듯, 사람이 사람다움을 잃고 인간의 도리가 땅에 떨어졌을지라도 손톱만큼의 도덕은 있어야 사람 사는 세상이라는 거.
단 한곡의 음악도 없이 강물소리만으로 간결하게 흘러간다. 시를 쓰고 싶은 할머니 미자. 시를 쓰는 법을 배우지만 시를 쓰지 못한다. 그 시조차 시를 좋아한다는 사람들한테까지도 자기 과시의 수단일 뿐, 조롱거리로 전락해 있다. 낭송회 뒤풀이에 나타난 시인은 술에 취해 “시는 죽어도 싸!”하고 소리 지른다. 몹쓸 짓을 하고도 숟가락 가득 밥을 퍼먹는 철부지 손자. 성폭행 당한 아이는 스스로 목숨을 끊고, 가해학생의 부모들과 학교는 위자료 3000만원으로 없었던 일로 치자고 한다.
부조리와 부도덕의 세계에 끝끝내 닿지 못하는 미자는 아름다움과 도덕 사이에서 꺽꺽 울음을 터뜨린다. 스크린으로 돌아온 누님 같은 배우 윤정희가 식당 마당에 쪼그리고 앉아 처연하게 오열하는 모습은 관객의 가슴을 후빈다.
음담패설을 시로 여기는 형사가 묻는다. “누님, 왜 우세요. 시 때문에 우세요? 시 못써서.” 시는 꽃을 보고 쓰는 것만이 아님을 깨닫는 순간 미자의 시는 드디어 완성된다. 강물로 시작해 강물로 끝나는 영화는 그 자체로 아름다운 시가 됐다.
중도일보(www.joongdo.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