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줄거리>
식당 주방 일을 하던 은이는 유아교육과를 전공한 덕분에 부잣집 하녀로 들어가게 된다. 임신한 안주인 해라의 수발을 들고 주인집 남자 훈의 아침식사를 준비하는 게 그녀의 업무. 어느 날 주인 가족들의 온천 여행에 따라간 은이에게 훈은 은밀한 유혹을 해오고 은이는 응한다.
‘하녀’는 제작단계부터 줄곧 관심의 초점이 돼왔다. 고 김기영 감독의 동명 작품을 리메이크했고, ‘오래된 정원’ 이후 차기작을 모색하던 임상수 감독의 3년만의 신작이며 칸영화제 여우주연상을 받은 전도연의 복귀작이란 점에서 영화팬들은 더욱 몸이 달았다.
김기영 감독은 1960년 젊은 하녀와 관계를 맺고는 파국으로 치닫는 한 남자의 비극을 그린 ‘하녀’를 발표했다. 당시 여배우 이은심의 팜므파탈적인 매력과 파격적인 노출로 큰 충격을 던졌던 이 작품은 우리 영화사에 서스펜스 스릴러의 걸작으로 이름을 새겼다.
13일 개봉된 ‘하녀’엔 김기영은 없었다. 모티브를 따왔고 김기영의 영화정신-비관적인 삶의 양식과 허위의식을 공격하는-을 이어받았지만 전혀 다른 이야기다. 고스란히 임상수의 영화다.
임상수 감독의 전작에서도 보았던 사회에 대한 조롱과 이를 다시 비틀어 보여주는 계급 갈등, 거대한 사회 구조에 대한 은유는 흥미롭다. ‘하녀’의 오프닝은 우리 영화에서 매우 드문 이미지를 보여준다. 여자들이 음식을 배달하고 음식물 쓰레기를 버리고 전단지를 뿌리고 전을 부친다. 심지어 거리를 순찰하는 경찰도 여자다. 야무지게 대게를 먹는 여자, 통유리창 너머로 노래 부르고 춤추는 여자도 있다. 이 와중에 잠깐 나와 통화 중이던 앞치마를 두른 여자는 “아줌마 뭐해, 빨리 들어와”라는 동료의 재촉에 담배를 비벼 끄고 음식점으로 들어간다. 일하는 여자들의 세계에도 엄연히 계급이 존재하는 것이다.
집이 아니라 갤러리 같은 느낌을 주는 대저택. 집 주인과 가족들은 언제나 예의바르게 고용자들을 존중해주지만 계급은 엄연하다. 집주인 훈의 아래엔 아내인 해라와 딸 나미가 있고, 그 아래엔 고참 도우미 병식이 있고, 또 그 아래엔 하녀 은이가 있다. 계급이 있는 정도가 아니라 구성원들은 계급을 지키기 위해 분투한다. 안주인 해라조차도 남편의 사회적 지위와 부를 놓치지 않기 위해 남편의 부정을 알고도 거짓 웃음을 짓고, 자신이 낳은 아이에게 상속시키기 위해 전전긍긍한다. 가진 자들의 본성을 밑바닥까지 드러내면서 영화는 묻는다. 하녀는 과연 사라진 단어인가. 이 시대에 하녀는 과연 누구인가.
순박함으로 시작해 광기로 치닫는 은이의 전도연과 ‘하녀근성’이 뼛속까지 밴 병식의 윤여정의 연기는 압권이다. 둘의 연기를 보는 것만으로도 ‘하녀’는 볼만한 가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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