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미있는 사실은 선거철만 되면 다른 분야에서 밀린 예술이, 예술가가 특별히 더 보호받고 구원받아야 하는 대상으로 전락한다는 사실이다. 예술을 둘러싼 정책의 구성요소와 구조 자체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 후보자들은 인심 쓰듯 예술가, 예술계에 대한 “지원”을, 그것도 매우 모호하고 추상적이며 무엇 하나 명확하지 않은 말들로 강조를 하곤 한다.
과거 선거에서 공개된 예술분야 공약들을 검토해보면, 대다수의 후보들은 예술분야 공약을 “예술가 후원 정책” 정도로 이해하거나 축소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예술은 예술가는 물론 모든 시민의 감수성과 표현, 사회적 창의성 등과 관련된 영역임에도 불구하고 후보들의 공약은 단순히 표밭을 관리하기 위한 이해당사자 중심으로만 정책 범위를 한정지었고, 그곳에 예술을 가두는 소극적인 경향을 보여 왔다. 그렇기 때문에 당연히 예술정책에 대한 정체성과 위상은 심각하게 왜곡·축소될 수밖에 없었으며, 시정 전반에 걸친 정책의 통합성은 찾아 볼 수 가 없었다.
예술이 사회적으로 중요한 영역으로 자리 잡을 수 있었던 것은 인류 역사상의 모든 공동체에서, 그 어떠한 경우에도 공동체의 현실에 주목하고 미래를 상상하는 역할을 해왔기 때문이다. 제사장에서 시인에 이르기까지, 노래를 하거나 그림을 그리거나 춤을 추면서 예술은 언제나 그 공동체를 둘러싼 무한한 상상력과 비전을 제공하는 원천으로 그 기능을 다해왔다. 따라서 대전 시민들의 삶을 4년 동안 책임져야 할 지도자에게 예술이 요구하는 것은, 예술에 대한 단순 “교양과 사교(社交)”가 아닌 예술이 사회 구성 요소로서 제공하고 있는 상상력과 그 창조성에 귀를 기울여 달라는 것이다.
지금의 선거 풍토를 비롯하여 과거의 낡은 정치문화에서 예술은 언제나 부차적인 영역이었고, 경쟁력과 생산력을 위한 상징체계에 불과했지만, 예술이야말로 정치, 경제 권력으로 구조화되고 부패된 현대 사회에서 끊임없이 새로운 미래와 사회적 비전을 제시하는 영역이라고 할 수 있다. 현재의 패러다임은 단순히 예술의 배고픔에 대한 해결책만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낡은 정치, 경제 패러다임에서 해결하지 못했던 사회적 상상력과 창조성을 이제는 예술을 통해 새로운 대안과 미래를 찾아나가는 시도를 해 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현재에 우리지역의 예술이 정치적인지 아닌지에 대한 논의와 누구 옳고 그른지에 대한 논란이 많다. 이는 30년대 전향한 전(前) 조선 프롤레타리아 작가동맹(카프)의 박영희가 말한 “얻은 것은 이데올로기요, 잃은 것은 예술”이라고 했던 발상의 편견을 말하려는 것도 아니고, 1960년대 김수영과 이어령이 벌였던 '순수는 비정치적인 것이요 참여는 정치적인 것이므로 불순한 것이다'라는 이분법적 문학 논쟁을 재현하려는 것도 아닐 것이다.
정치성의 많고 적음이 예술의 순수성을 가늠하는 잣대가 될 수 없다면 지역문화예술의 발전이라는 큰 틀에서 예술은 정치로부터가 아니라 예술을 소비하는 주체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방법에 대해 더 논의를 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만약에 존재하는 것이 있다면, 정치적이냐 비정치적이냐의 이분법이 아니라 정치적으로 올바른 예술이냐, 정치적으로 그릇된 예술이냐의 다툼만이 있어야 하고, 무엇보다도 정치지향적인 예술보다는 오히려 권력 지향적이고 자기 잇속만을 차리는 못된 예술을 문제 삼고 경계해야 한다. 예술가 삶 또한 예외는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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