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 발발 직전의 조선. 정여립을 비롯한 황정학 이몽학 등은 ‘대동계’를 만들어 왜구와 싸우지만 조정은 이들을 역모죄로 해체하려 든다. 이몽학은 조정부터 갈아엎고 왜를 쫓아내자며 혁명을 주도하고, 맹인 검객 황정학은 그를 말리기 위해 찾아 나선다.
이준익 감독은 박흥용 화백의 만화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을 읽고는 “이거다”, 무릎을 쳤을 것 같다. 부패하고 부정한 정치, 세상의 부조리를 감내하며 스스로 탈출구를 찾는 인물의 드라마는 그가 ‘황산벌’ ‘왕의 남자’에서 관객들에게 건네 온 이야기 전부가 담겨있다. 하지만 만화를 영화로 만드는 과정은 쉽지 않았던 모양이다. 꽤나 고민했던, 그리고 공을 들인 흔적이 영화 곳곳에서 묻어난다. 영화 ‘구르믈…’은 임진왜란의 기운이 조선을 위협하던 혼란한 시기에 세상을 향해 칼을 뽑아든 네 남녀의 이야기다.
부패한 정치를 베어버리겠다며 반란을 꾀하는 대동계의 수장 이몽학(차승원), 한때 뜻을 같이 했으나 이몽학의 야심을 알아차린 뒤 이를 막으려는 맹인 검객 황정학(황정민), 서자로 태어난 한을 삭이지 못해 스스로를 ‘개새끼’라 자조하지만 아버지를 죽인 이몽학에게 복수하려는 견자(백성현), 이몽학을 가슴에 담았으나 그의 마음을 얻지 못한 기생 백지(한지혜)가 뒤얽힌다.
이준익 감독은 네 사람의 드라마를 그의 장기인 마당극 형식으로 풀어낸다. 인물들은 자신이 느낀 세상을 까발리고 고발하고 조롱한다. 그리고 한데 어우러짐으로써 절정으로 치닫는다. 이 한판 어우러지는 춤은 ‘왕의 남자’ 같은 비극조차 감동으로 승화시키는 힘이 있다.
그러나 감독은 모험을 감행한다. 마당극의 뼈와 살은 풍자와 해학, 은유다. 그런데 은유를 빼버리는 것이다. 자신의 장기를 발휘하되 기존의 틀에서 벗어난 뭔가 달라진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던 걸까. 그러나 은유가 빠진 마당극은 버석거린다. 이 새로운 시도가 관객에게 어떻게 다가올지. 아직 미지수지만 극과 극으로 맞선 평가를 받지 않을지.
뼈만 앙상한 직설적인 대사는 이몽학과 황정학이 서로에게 겨눈 칼날을 더욱 날 서게 해 긴장감을 부여한다. 반면 캐릭터의 입에서 쏟아지는 감독의 정치적 철학은 관객의 몰입을 방해하고 캐릭터들의 생생한 매력을 거세해버린다.
각각의 캐릭터들이 한데 어우러지는 한판 칼춤이 절정으로 치닫지 못하는 것도 마당극의 날개를 꺾어버린 치명적인 한계에서 오는 건 아닐지.
이런 한계에도 불구하고 ‘구르믈…’은 뛰어난 영화다. 특히 배우들의 연기가 훌륭하다. 직설법의 영화에서 유일하게 은유를 말하는 맹인 검객 황정학을 연기한 황정민은 천연덕스런 사투리와 표정으로 물 오른 연기를 보여준다. ‘칼잡이는 칼 뒤에 숨어야 한다’는 황정학에게 ‘칼 뒤에 숨으면 영 재미가 없거든’하고 맞서는 이몽학의 차승원은 큰 키와 흰 도포로 날카로운 느낌을 살리면서, 슬픔을 가득 담은 눈으로 야망과 이성 사이에서 흔들리는 몽학의 내면을 그려낸다. 사실 영화의 주인공은 황정학이나 이몽학이 아니라 견자다. 황정학과 긴 여정을 함께 하면서 매력 넘치는 인물로 변하는 신예 백성현의 견자 연기도 좋다.
역사의 질곡과 거기에 파묻혀 고민하는 인물들, ‘구르믈…’은 이준익 감독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재료일 것이다. 그러나 고민을 너무 많이 했고, 욕심을 너무 많이 부렸다. 새로운 시도에 드라마, 연기, 액션, 음악까지 최고만 담고 싶은 욕심이 느껴진다. 풍경만 해도 그렇다. 전국 팔도를 돌며 촬영했다는 풍경은 영화 곳곳에서 아름다운 풍광을 펼쳐낸다. 그러나 최고만 모았다고 최고의 작품이 되는 건 아니다. 넘치면 모자람만 못한 법이다.
중도일보(www.joongdo.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