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민찬 대전대 교수 |
초조해진 양패가 점을 치도록 해보니 섬에 있는 연못에 제사를 올려야 한다는 점괘가 나왔다. 서둘러 제사를 올린 그날 밤 양패의 꿈에 한 노인이 나타나 활 잘 쏘는 사람 하나를 남겨 두면 순풍을 맞을 것이라고 했다. 그래서 남게 된 군사가 거타지였다. 누가 남는가 내기를 했는데 거타지의 이름이 적힌 목간이 물속으로 가라앉았던 것이다. 순풍을 맞이한 그날 배는 바로 중국으로 떠나갔다.
혼자 남은 거타지에게 다시 한 노인이 나타나 부탁을 했다. 해 돋을 무렵이 되면 중이 찾아와 가족들을 잡아먹는 바람에 이제는 자기 부부와 딸 하나만 남았다고 하며, 내일도 또 찾아올 것이니 그러면 그때 활로 쏴달라고 했다. 노인은 서해의 신이었다. 이튿날 아침이 되자 과연 중이 나타났다. 중이 주문을 외며 노인의 간을 꺼내려 할 즈음 거타지가 화살을 날려 중을 거꾸러뜨렸다. 그런데 땅에 떨어진 것을 보니 늙은 여우였다. 노인은 거듭 감사하며 딸을 꽃으로 바꾸어 거타지의 품에 넣어주고는 용 두 마리에 태워 중국으로 가게 해주었다. 거타지가 용의 호위를 받고 오는 것을 본 중국인들이 크게 환대를 해주었고, 본국으로 돌아와 품에서 꽃가지를 꺼내자 꽃이 여자로 변하여 둘은 부부가 되어 함께 살았다.
읽기를 마치고 난 뒤에 곡도라고 하는 그 섬이 지금의 백령도라고 설명 한 마디를 덧붙여주었다. 그 순간 “아-” 하는 탄성이 학생들 사이에서 터져 나왔다. 예상한 것보다는 빠른 반응이었다. 옛날의 기록을 지금 여러분의 것으로 바꿔볼 줄 알아야 한다는 평소 주문을 그날 수업에서는 제대로 받아주었던 것이다. 그러면 거타지는 누굴까? 지금 또 거타지는 누구인가? 서해의 신이라고 하는 노인은 누굴까? 지금 또 그 노인은 누구인가? 무엇보다도 궁금한 것이, 중의 탈을 쓴 늙은 여우는 정체가 무엇인가? 그것은 또 지금 무엇이란 말인가? 착 가라앉은 수업 분위기에 나의 중학생 시절 경험담을 꺼내어 화제를 전환하였다.
학생들이 모은 방위성금으로 국내 기술진이 최초로 개발했다는 쾌속함 진수식이 오래전 부산에서 있었다. 그때 그 행사에 참석한 일이 있다. 행사를 마친 뒤에는 해군 측의 배려로 구축함을 견학할 기회도 있었다. 부산함으로 기억하는 당시의 그 전함은 쾌속함보다는 규모가 훨씬 큰 배였다. 하지만, 내부는 몹시 협소하고 복잡하여 통로와 계단 모두 사람 하나 간신히 빠져나갈 정도로 비좁았고, 낡기도 많이 낡아 군데군데 페인트가 벗겨진 곳도 있었다. 거기에 비하면 흰 모자에 네이비블루 셔츠를 입고 갑판 위에 늘어선 당시 수병들은 지금도 선명히 기억하는 산뜻한 모습이었다.
후배들을 찾아 바다로 뛰어든 한주호 준위의 마지막과 천안함 장병들을 찾다 연락이 끊어진 금양호 선원들의 행방을 보며, 연달아 벌어지는 이 일들이 과연 늙은 여우의 조화는 아닌가 그러한 생각까지 들기도 했다. 두 동강 난 천안함이 바지선에 실려 오는 장면을 보다가는 슬픔이 목을 타고 올라와 힘이 들었다. 쌍룡의 호위는 어디로 사라졌는가? 이 아침, 자신의 이름을 곡도 앞바다에 가라앉히고 호국신으로 돌아온 마흔여섯 명 거타지의 후예들을 헤아려 본다. 그들은 지금 그 좁은 미로에서 벗어나 네이비블루에 흰 모자를 쓰고 다시금 우리 앞에 나타나 있다. 남은 자들의 몫은 늙은 여우의 정체를 밝혀내는 일.
옛날 옛적 거타지의 품속에서 나온 꽃가지인 양 나는 국화꽃 한 송이를 손에 들어 그들의 영정 앞에 올려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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