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기웅 서산 대산중 교사 |
그 아이들에게 무작정 다가가, “야, 너 키 큰 놈, 너 이름이 뭐니?” “예? 저 김기진이라고 하는 데요.”
이어 아이의 인적사항에 대해 이것저것을 물어 봤다. 기진이는 인근에 있는 초등학교에서 특별활동으로 배구를 하고 있었으며 공부보다는 운동을 더 좋아한다고 했다. 더 이상 생각할 필요가 없었다. 그 다음날 무작정 음료수 몇 병을 들고 기진이네 집을 방문했다. “기진이 제가 책임지고 잘 지도하겠습니다. 저에게 맡겨 주세요.”
몇 개월 후, 여름방학이 시작되고 오랜만에 휴가를 주었다. 휴가를 마치고 숙소에 들어오는 날 약속된 시간이 지났는데도 기진이만 보이지 않았다. 걱정이 되어 할머니께 전화를 걸었다. 기진이는 학교에 간다고 아침에 집에서 나갔다고 했다. 시내에 있는 오락실, PC방을 찾았다. 기진이는 그 어디에도 없었다. 다음 날도 기진이는 학교에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다. 또 다시 오락실과 PC방, 시내를 돌아다니며 기진이를 찾았다. 그때 나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할머니셨다. “선생님, 기진이 친구네 집에 있답니다.” 한달음에 달려가 기진이의 손을 잡았다. “선생님, 운동이 너무나 힘들고 하기 싫어졌어요.” “그래, 기진이가 친구들과 좀 더 놀고 싶은 거구나. 기진아, 선생님이 너에게만 특별 휴가를 주마. 눈물 닦아라. 이틀만 더 놀면 되겠지? 할머니와 약속을 지키는 착한 기진이가 되어야지.”
기진이는 한참 클 시기인데, 식사량이 적어 걱정이었다. 기진이를 위해 동네 한의원에 들러 보약을 지어 “기진아, 이거 먹어라. 다른 형들이 물어보면 '어젯밤에 할머니께서 다녀가셨다'라고 하고 알았지.” 그 때 기진이의 환한 얼굴을 생각하면 지금도 기분이 좋아진다.
시간이 흘러 어느덧 2학년 된 기진이. 키도 많이 자랐고 공도 제법 잘 다룬다.
그 해(2007년) 전국종별선수권대회가 보령에서 열렸다. 기진이를 비롯한 모든 아이들이 열심히 경기에 임한 결과 6강에 올랐다. 6강전 초반, 블로킹 중 오른손 손아귀가 찢어지는 부상을 입었다. 나는 작전타임을 요청하여 기진이의 손을 봤다. 더 이상 경기를 할 수 없을 만큼 부상이 심했다. 그렇지만 기진이가 없는 상황에서는 경기의 승패가 불을 보듯 뻔했다. 이어 나는 선수교체를 하고 응급조치를 하며 기진이에게 물었다. 경기를 계속 할 수 있겠냐고.
기진이는 이렇게 말했다. “선생님, 저는 괜찮습니다. 걱정하시지 마세요. 그리고 이 경기 꼭 이기고 싶어요. 그동안 고생했는데 4강 입상 해야죠.”
그 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내 눈이 뜨거워진다. 기진이는 다시 코트에 들어갔고 아픔을 참으며 혼신을 다했다. 그리고 기분 좋게 4강에 입상했다. 지금 기진이는 어느 덧 고2가 되었다. 지금도 가끔씩 전화가 온다. “선생님, 저 기진이입니다. 저 잘하고 있어요. 이젠 걱정하지 마세요. 선생님 몸은 어떠세요? 담배 끊으셨죠? 건강하세요. 휴가때 들를게요.” 초등학교 6학년이었던 기진이. 숙소 이탈을 여러 번, 그렇게 속을 썩이던 놈이 이제는 그렇게 말한다.
교직 20년. 나와 함께했던 사랑하는 나의 제자들이 있기에 나는 행복했고 지금도 나는 행복하게 살아간다. 오늘도 파이팅을 외치며 굵은 땀방울을 닦고 있을 나의 아들들을 생각하며 나는 오늘도 두 손 모아 기도한다. 아이들의 더 힘찬 함성이 울리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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