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 4월 19일 오전, 당시 고등학교를 갓 졸업한 4·19민주혁명회 대전충청연합지부장 신종구(72)씨는 서울시청 광장에 있었다.
각자 온 길은 달랐지만 이 땅의 민주화라는 갈 길은 같았다.
궐기대회를 마친 시민들은 경무대가 있는 효자동, 정치깡패 본거지인 동대문, 내무부(현재 행안부)로 통하는 을지로 쪽으로 각각 나눠 행진을 시작했다.
신씨는 을지로 대오에 합류했다.
오후 2~3시께 경찰이 발포하기 시작했다. 여기저기서 “경찰이 왜 국민에게 총부리를 겨누는가? 자유당 정권이 결국 국민을 죽이는구나”라는 탄식이 들렸다고 신씨는 회고했다.
목이 터져라 “자유당 정권 물러가라. 이승만 하야하라”를 외치던 신씨는 을지로와 종로2가 사이에서 경찰이 쏜 총알 2발을 왼팔에 맞았다. 귀청을 찢을 듯하던 동지들의 함성은 점점 희미해졌다. 그 자리에서 쓰러졌다. 이것이 신씨가 기억하고 있는 4·19 혁명의 기억이다.
신씨는 “한참 만에 눈을 떠 보니 동대문에 있는 이화여대 부속병원 복도였다”며 “총을 맞고 중상을 입은 동지만 그 병원에 100명이 넘었다”고 처절했던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왜 시위 현장에 갔었느냐는 질문에 신씨 답변은 단호했다.
그는 “사사오입 부정선거 등 자유당의 부정부패가 극에 달했고 관공서뿐만 아니라 민간회사도 자유당 끈이 없으면 들어가지 못할 정도로 민생도 피폐했다”며 “부정부패 척결과 민주화를 위해 그 시대를 사는 젊은이들은 거리로 나오지 않으면 안 될 상황이었다”고 눈시울을 붉혔다.
충북 증평 출신인 신 지부장은 충북 증평이 고향으로 한국전쟁 때 대구로 피란, 피란민 학교인 대구 서부고교를 졸업해 4·19가 일어나던 그해, 서울에서 취업과 대학교 진학을 준비 중이었다.
4·19혁명은 자유당 정권이 막을 내리는 결정적 계기가 됐고 신 지부장은 이듬해 5·16 이후 국가재건최고회의로부터 건국포장을 받았다.
1963년 대전에 있는 조폐공사에 취직(1980년 퇴직)한 이후 신씨는 지금까지 대전에 뿌리내리며 살고 있다. 2007년 설립된 4·19 민주혁명 대전충청연합지부를 운영하며 가금씩 대전에 있는 동지들을 만나 격동의 1960년 봄을 이야기하곤 한다. 그는 4·19혁명의 정신을 후손들이 계승해야 하고 대전시민들의 민주화 의식을 강화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
신씨는 “올해 대전에서 4·19 관련 행사가 없고 지역 내에 4·19 기념탑도 없다는 것이 씁쓸하다”며 “정기적인 심포지엄 개최 등으로 4·19정신을 계속 이어나가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강제일 기자 kangjei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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