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구 경기가 열리던 날, 마을의 한 노인이 총을 들고 야구장에 난입했다가 보안관에게 사살 당한다. 그게 시작이었다. 사람들이 광기에 휩싸여 무차별 살인을 저지른다. 데이빗은 인근 호수에 추락한 비행기가 연관이 있음을 직감하지만 군대가 마을을 봉쇄하고 주민들을 제압한다.
사람들이 미쳐간다. 딱히 이유를 알 수 없다. 다들 정신줄을 놓고 게걸스럽게 피를 탐한다. 곁에 있는 동료조차 믿을 수 없다. 주인공들은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 친다. ‘크레이지’는 ‘좀비영화’의 공식을 충실히 따른다. 하지만 이 영화, 특별하다.
비밀스런 공권력, 치명적인 바이러스, 새롭게 업그레이드된 좀비 등 21세기 호러 트렌드가 다 들어있다. 스피디한 연출로 관객의 심리를 조여 오는 세련된 감각도 좋다. ‘신종플루 시대의 좀비영화’란 소리를 들을 만하다.
핏물이 스크린을 흥건히 적시며 위장을 불편하게 하지도 않는다. 투박하고 직선적이고 솔직하다. 눅눅한 불쾌감을 주기보다 솜털을 곤두세우게 하며, 기이한 서늘함을 전한다. 정직하게 장르적 규칙에 충실하기에 오히려 손에 땀을 쥐게 한다.
놀라게 할 때 놀라게 하고, 마음을 졸이게 할 때 조마조마하게 하는 브렉 아이즈너 감독의 연출 솜씨가 매끈하다. 오래된 이층집, 자동 세차장, 병원 등 일상적인 공간을 이용한 영화의 스릴러 시퀀스들은 웨스 크레이븐 같은 장르의 대가들에게서 제대로 배운, 혹은 제대로 베낀 티가 난다. 이 시퀀스들을 연속적으로 밀어붙이며 관객이 손톱을 물어뜯게 만드는 재주로 가득하다.
영화에서 무서운 건 바이러스 자체가 아니라 바이러스에 감염된 뒤 잔인하게 폭력을 휘두르는 사람들이고, 대를 위해 소를 희생해야 한다는 논리로 가타부타 설명 없이 무자비하게 시민을 통제하는 군대다. 방독면을 쓴 군인들이 체온을 잰 뒤 이상 반응을 보이는 사람들을 다짜고짜 격리하고 살균실로 끌고 가는 장면은 현실적 공포를 안겨준다. 특히 군부대가 마을 사람들을 총살하고 불사르는 장면을 무심하게 원경으로 비추는 장면은 할리우드 영화답지 않게 섬뜩하다.
호러영화의 거장 조지 A. 로메로가 1973년 내놓은 ‘분노의 대결투’를 리메이크했다. ‘크레이지’는 클래식에 대한 제대로 된 경배인 동시에 원전을 뛰어넘는 보기 드문 리메이크다. 공포영화 팬이라면 놓칠 수 없는 수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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