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인죄로 복역하는 수인은 에이즈 감염자라고 다들 멀리하는 상병에게 접근한다. 상병의 피를 몰래 수혈해서라도 에이즈에 감염되면 출소할 거라 믿는다. 하지만 감옥을 벗어날 수 없었던 수인은 입원 치료 도중 결국 탈옥한다. 수인은 상병이 소식을 궁금해 했던 미아를 찾아가는데.
제목 그대로 폭풍전야를 보여준다. 한 바탕 광풍이 휩쓸고 가기 전의 잔잔함. 휘몰아치는 태풍은 없다.
주인공 미아와 수인은 절망의 벼랑 끝에 선 인물이다. 그러나 이들은 세상을 원망하거나 분노를 표출하지 않는다. 통속 멜로드라마에서 흔히 보여주는, 사랑의 영원한 맹세도, 아름다운 희생도, 부질없는 희망도 말하지 않는다. 그저 조용히 서로를 바라볼 뿐이다. 사납게 요동치는 제주도의 차디찬 바람과 파도가 스산하고 격정적인 그들의 마음을 대신 전해준다.
촘촘한 감정표현에 비해 주인공들을 둘러싼 사건들은 굵직굵직하다. 살인 누명과 에이즈라는 이중고를 떠안은 채 탈주범이라는 족쇄까지 차게 된 수인. 씻을 수 없는 정신적 상처와 함께 찾아온 육체적 고통을 감내해야 하는 미아. 존재 자체로도 이미 아픈 사람들이다.
조창호 감독은 손끝 하나 대지 않고 대사, 눈빛 등 감정선 만으로 두 사람의 사랑을 오롯이 전달한다. 복잡한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안으로 삭히는 연출은 작위적인 설정과 투박한 전개조차 눈 감게 만든다. 절망과 체념으로 슬픔에 잠겨있다가도 아무렇지 않은 듯 담담하게 행동하는 둘의 태연함은 오히려 묘한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눈을 감으면 사라지지 않고 그제야 비로소 이야기가 들린다. 이 영화 대체 뭐야, 무슨 마술을 건 거야? 하는 의심이 들 정도다.
안타까운 사랑의 결말에도 관심이 없다. 극 후반, 수인과 미아가 동시에 쓰러지는 장면이 등장하는데 그냥 웃음으로 마무리한다. 동영상으로 화제가 됐던 육체적 사랑도 자꾸 미뤄지고, 맨 마지막에 가서야 등장한다. 파도치는 바닷가 풍경, 그리고 사랑조차 절제하는 남녀 주인공과 곳곳에서 드러나는 회화적 질감은 조 감독의 조연출 시절 김기덕 감독과 작품을 함께 했던 흔적을 말해주는 것 같다.
현실적인 대사와 논리적인 연결, 풍성한 내러티브를 기대한다면 이 영화는 보지 않는 게 좋다. 소멸로 향하는, 그 과정이 주는 절망감과 공허함을 담담하게, 아련하고 쓸쓸한 감정을 기쁘게 즐기고 싶다면 꽤 괜찮은 영화가 되어 줄 것이다. 특히 ‘선덕여왕’에서 비극적인 운명의 비담 역을 연기한 김남길의 팬이라면 꼭 챙겨볼 만하다.
죽음밖에 남지 않은 두 사람이 기대할 수 있는 삶의 마지막 마술은 무엇일까. 두 사람은 과거를 지우고 마술처럼 웃으며 세상에서 사라질 수 있을까. ‘폭풍전야’는 판타지의 기운을 빌려 세상과 화해하는 법을 넌지시 제시한다. 따뜻한 마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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