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호택 국제로타리 3680지구 총재 |
김 전 대통령이 서거하기 전에 몇 번의 입원과 퇴원을 반복하고 중환자실과 일반병실을 오가면서 달포를 고생하신 '덕'에 문병 온 여러 정치주체들이 '세브란스병원에서' 대화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는 것이다. 당신 스스로는 말 몇 마디 못할 어려운 상황이었겠지만 그 분의 권위와 후광 자체가 중재자 역할이었을 것이다. 병중의 침대 밑 대화에서 경색되었던 여야의 대치정국도 풀렸고, 북한에서 병문안 오면서 남북대화의 물꼬도 열렸다고 한다.
결국 돌아가시면서까지 나라를 위해 큰 일을 하며 돌아가신 큰 어른이란 의미에서 '김 전 대통령이 잘 죽었다'는 말은 욕이 아닌 극존칭의 반어법이 된 셈이다.
서울에서 고향 금산으로 귀향하면서 나에게 가장 힘든 일은 친구가 없다는 것이었다. 금산에서 태어나기는 했지만 유치원부터 서울에서 학교를 다녔으니 나에게 금산은 고향이면서도 타향이었다. 서른 여섯이란 나이에 돌아온 것도 조금 늦은 감이 있던 터였다.
마음으로 정착하기까지 걸린 5년여 동안 내 마음을 붙들어준 것은 아버지와 돌아가신 어머니의 얼굴, 가족들의 눈망울, 내 병원을 찾아주는 아이들, 가끔 만나는 서울의 옛 친구들, 그리고 금산로타리클럽에서 만난 30년 연배에서 10년 후배에 이르는 '친구들'이었다. 거기에 덧붙여 우연히 손에 쥐게 된 법정 스님의 글에서 나는 커다란 마음의 안정을 얻었고 '나는 부처님 팬'이라며 농담하던 얼치기 불교신자가 절을 찾아 108배를 하기 시작했다.
출가 전의 어려운 사정과 젊은 시절의 엄청난 고민과 치열한 구도정신을 담담하게 풀어나가는 법정 스님의 글을 읽으면서 '내 고민은 고민도 아니다. 이런 분도 있다'는 생각이 마음의 위안을 갖게 해주었다. 매스컴에서 본 그 분의 얼굴이 내가 마음속으로 그리던 모습과 너무 닮아 혼자 좋아하기도 했다.
며칠 전에 입적하신 법정 스님의 다비식을 TV에서 보면서, 그리고 장작더미에 불이 붙자 '빨리 나오시라'며 신도들이 절규했다는 신문기사를 보면서 눈물을 글썽거렸다. 그리고 나는 잘 살아 왔는지, 지금 잘 살고 있는지, 그리고 앞으로 잘 살 것인지를 다시 한 번 되돌아보았다.
사람이 한 평생을 살면서 한때 잘 살 수는 있겠지만 죽을 때 '잘 죽었다'는 말을 듣기는 참 어려울 것 같다. 잘 죽는다는 것은 죽을 때까지 잘 살아야 한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잘 죽기 위해 잘 살아야 하겠다, 그리고 잘 살기 위해 더 열심히 살아야 하겠다는 다짐을 혼자 해본다.
어떻게 살면 잘 죽을 수 있을까? 법정 스님이 어느 사진기자에게 붙여 주었다는 일여(一如)라는 별호(別號)와 같이 한결같은 마음을 가진다면 가능할까?
하긴 공자님도 '군자(君子)는 항심(恒心)'이라고 말씀하셨다고 하니 빈부에 따라, 지위의 고하에 따라, 그리고 세속적인 성공과 실패에 따라 조석변이로 변하는 내 속물적 마음만 다잡을 수 있다면 잘 죽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해본다.
나는 잘 죽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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