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대 초반에 이용기술을 배워 일흔이 넘은 현재까지 가위를 놓지 않고 있는 대전지역 이발소의 터줏대감 김태운(71)씨는 가위와 함께한 50년 인생 중 가장 안타까운 때가 이발소의 퇴폐영업이었다고 회고한다.
“1970~1980년대 장발단속이 한창이던 때 그야말로 이발소는 인산인해였죠. 하루 종일 서서 머리만 깎았으니까요. 이발소로서는 그때가 가장 전성기였던 것 같습니다.”
고향 서산을 떠나 대전에서 이용기술을 배운 김 씨는 1970년대 초반 대전시 중구 선화동에 화신이발관을 시작했고 이어 옛 대전시청이 있던(현 중구청) 대흥동에 쌍암이용원을 열어 현재까지 영업 중이다.
그러나 전성기도 잠시, 이발소를 찾던 학생들과 아저씨, 할아버지들은 하나둘 미용실로 발길을 돌렸다.
김 씨는 이 이유를 이발소의 퇴폐영업 때문이라고 치부한다.
“이발사, 면도사, 세발사(머리 감겨주는 사람) 등 여러 사람들이 일하던 이발소에서 여성들은 면도만하고 세발사가 남는 시간을 이용해 손님들에게 안마를 해줬는데 1980년대 후반 여성들이 안마를 하기 시작했다”는 김 씨는 “여자들이 안마를 하게 된 건 순전히 손님들이 조장한 것으로 이것이 불행의 씨앗이 되었다”고 한숨을 쉬었다.
손님들이 여자 면도사들에게 안마를 하게하고 팁을 주기 시작했다는 게 그의 말로 “하루 이발소 수입이 5만원이 안되던 시절 팁만 30만원이 넘었으니 성실한 면도사들도 면도기를 버리고 안마사로 전락하지 않겠습니까?”라고 목소리를 높이며 “이때부터 이발소의 퇴폐영업이 시작되었다”고 평가했다.
또 일부 사람들은 이발소에 여자 안마사가 없으면 돌아가기도 했으며 반대로 대부분의 남자손님들은 미용실로 발길을 돌렸다는 것이다.
김 씨는 “일부 이발소에서 당시 퇴폐영업으로 수익을 올렸을지 모르지만 그 결과 남성들의 사랑방 구실을 하던 평범한 동네 이발소들은 지금까지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이라며 안타까워했다./임연희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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