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승선 충남대 언론정보학과 교수 |
잘 아는 것처럼 김수환 추기경 역시 틀림없는 언론인이었다. 그는 1963년부터 2년 동안 '가톨릭시보사' (현 가톨릭신문) 의 사장으로 일했다. 추기경의 표현에 의하면 신문사 사장 시절은 그의 일생에서 가장 열정적으로 일에 매달린 때였다. 신문에 게재되는 사설 (社說)은 거의 대부분 추기경이 직접 썼다. 한국 교회의 변화와 쇄신이 필요하다고 판단한 추기경은 유명한 목사와 스님, 명사들에게 고쳐야 할 단점이 무엇인지를 묻는 편지를 보냈다. 그들이 보내온 답장 원고들을 토씨하나 바꾸지 않고 그대로 신문에 게재했다고 전해진다. 뿐만 아니라 추기경은 '평화신문', '평화방송라디오', '평화방송케이블TV'를 창설해 운용했다. 말과 글을 통해 추기경은 대중과 소통했다.
법정 스님과 김수환 추기경은 서로 다른 종교적 터전에서 삶을 살았다. 커뮤니케이션의 토양도 달랐다. 서양의 언론은 '말'의 역사다.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는 복음에 기초한 기독교의 서양은 정치적 설득이나 법정의 변론을 위해 말을 잘하는 기술을 요구했다. 말문을 열어서 토론하고 웅변하는 힘은 서양의 정치시장에 진입하기 위한 필수품으로 여겨졌다. 불교의 동양 언론은 말을 경계한 '글'의 역사다. 말문을 닫아걸고 묵묵히 침묵할 수 있는 힘은 진리를 깨우치기 위한 바탕이었다. 동양의 정치시장에 입성하기 위해서는 글의 뜻을 글로써 헤아려 쓰고 글로 문장을 잘 짓는 기술이 요구되었다. 동양의 과거제는 글쓰기 시험장이었다.
기독교에 기반한 서양의 말 문화와 불교적 토양을 가진 동양의 글 문화는 김수환 추기경과 법정 스님의 한글 나라에 와서 소통하고 융합하였다. 글을 다듬어 쓰고 말을 아껴서 풀어놓는 것의 가치가 빛났다. 추기경은 길상사 법당을 찾아 '설법'을 하고 스님은 명동 성당을 방문해 '강론'했다. 세속의 셈법으로 추기경은 마흔 넷, 법정은 마흔 셋의 나이에 사설을 직접 쓰는 신문사 사장과 사설 쓰기가 본업인 논설위원, 주필의 역할을 수행했다. 두 분을 감히 언론인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제도권 언론사에 발을 담가서가 아니라 추기경의 말씀처럼 자기 것을 조금씩 상대방에게 양보해 대화하고 화합하는, 소통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스님의 말씀처럼 추기경은 '하느님에 대해 한마디도 하지 않지만 그 존재로서 지금 우리가 하느님과 함께 있음을 영혼으로 감지하게 하는 사람'이었다. 추기경에게 스님 역시 모든 걸 무소유하더라도 그의 '무소유' 언론만큼은 소유하고 싶은 존재였다.
언론인을 참칭하면서 오히려 언론을 농단하려는 사람들, 말과 글로 소통하려는 대신 일방적인 힘으로 불통을 불러오는 사람들이 넘쳐 난다. 이미 정치권으로 입성한 언론인 연하는 정치인과 정치권에 발을 담그려는 정치인 같은 언론인들로 시국이 혼미하다. 언론은 권력을 행사하는 자가 아니라 권력의 행사를 감시하는 자다. 언론은 대중 위에 군림하는 자가 아니라 대중의 입 높이에 자신의 귀를 맞추어 소통하는 존재다. 종교든 언론이든 정치든 모두 '소통'하는 사람들의 장이다. 스님의 하느님, 추기경의 부처님처럼 제대로 소통해주기 바란다. 소통의 첫 발은 (말하기 전에) 듣는 귀를 여는데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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