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용원 대전지방보훈청장 |
안 의사는 1897년 9월 2일 황해도 해주 광석동에서 태어났다. 태어나면서부터 가슴과 배에 검은 점 일곱 개가 있어 '북두칠성의 기운에 응해 태어났다'하여 '응칠이'라고 불렸다고 옥중에서 쓴 안응칠 역사라는 자서전에 기록돼 있다. 아마도 그때부터 안 의사가 훗날 나라를 위해 큰 일을 할 것이라는 짐작이 있었을 것이다.
성장한 안 의사는 일제 제국주의 침략의 부당성에 대한 분노와 독립에 대한 열망을 키워오던 중 애국계몽활동에 대한 필요성을 느끼며 1906년 28세에 삼흥학교와 돈의학교를 운영하고 서북학회에 가입했다.
이듬해인 1907년 안 의사는 러시아 영토인 블라디보스토크로 망명해 그곳에서 이범윤 등과 함께 의병을 일으키고, 1908년 300여 명의 의병부대를 거느리고 대한의병 참모중장으로 국내진공작전에 참가해 그때 사로잡은 일본병사들을 포로로 대우하며 당시 만국공법에 따라 석방한 평화주의자였다.
그리고 1909년 10월 26일 운명의 그날, 안 의사는 하얼빈의 가을 하늘을 가르는 세 발의 총성으로 한일합병을 주도하고 동양의 평화를 교란한 '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했다.
이날 대륙을 깨운 정의의 총성은 이토 히로부미 한 사람에 대한 개인적인 원한에서의 저격이 아닌 우리 민족의 자주독립의지와 일제의 부당성을 세계만방에 알린 의거였으며, 의거 이후 수감된 여순감옥에서 순국을 앞두고 쓴 안응칠 역사라는 자서전과 못다 쓴 동양평화론에 의해 세계평화의 방안을 제시하고자 한 사상가이기도 했다.
순국한지 100여 년이 흐른 지금도 “내가 죽은 뒤에 내 뼈를 하얼빈공원 곁에 묻어 두었다가 나라를 되찾거든 고국으로 옮겨다오”라고 남긴 안 의사의 유언을 따르지 못한 우리는 부끄러운 후손이고 부끄러운 국가보훈처다.
부끄럽고 안타까운 마음에서 대전지방보훈청에서는 순국일(26일) 전후인 23일부터 29일까지 안 의사의 영정에 국화를 헌화하는 캠페인을 전개하고 있다. 이 날 헌화행사에서는 자율적으로 모금되는 성금을 통해 안 의사의 동양평화론의 취지에 맞게 다문화가정을 돕는 데 쓰여질 예정이다.
안 의사는 국가독립, 사회정의, 동양평화라는 이념을 토대로 독립운동을 실천해 온 민족정기의 표상인 독립운동가다. 이번에 많은 시민과 학생들의 헌화 캠페인에 참여해 국화 헌화의 고귀한 뜻을 함께하고 안 의사의 숭고한 애국정신을 추모하는 계기를 마련하는 의미가 되길 기대해 본다.
한편, 헌화를 하는 방법에 대해 많은 의견들이 있었지만, 의전 전문가들의 의견을 들어본 결과 헌화는 고인에게 꽃 자체보다는 꽃향기를 바치는 의미이므로 꽃송이를 두 손으로 잡고 제단 앞으로 걸어간 후 꽃송이가 제단을 향하도록 하는 것이 올바른 절차라고 제시했다.
신라시대 향가인 헌화가에서 사랑하는 사람을 향한 한 노인의 헌신적인 행동을 보며 우리는 먼 과거로부터 우리 삶 속에 면면히 흐르고 있는 사랑의 고귀함을 배우게 된다. 안중근 의사가 사랑한 대한민국! 그리고 우리가 사랑하는 안중근 의사! 한 송이 국화꽃을 통해 그 사랑과 존경의 마음을 이번 행사에서 표현해 보는 것을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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