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문성 언론중재위원회 법무상담팀 차장 |
베일에 가려있던 전설 초향은 해방직후 공주갑부 김갑순의 후원을 받아 예능계를 청산하고 대전으로 내려와 대전극장을 인수했다. 초창기 대전여성 CEO였던 것이다. 또한 지금은 폐사(廢寺)된 천복사를 창건해 지역 종교부흥에도 힘을 쏟았으며 충남국악협회 초대 성악부 사범을 맡아 지역문화예술발전에 많은 기여를 했다. 드라마 '춤추는 가얏고'의 실제 주인공인 '함동정월'을 제자삼아 대전에서 가르치기도 했다. 그녀의 양아들은 굴지의 대기업 총수였으며 부총리까지 지냈다. 전설 박록주가 '나보다 더 뛰어난 소리꾼을 꼽으라면 단연 초향'이라고 했던 명창이 실은 1983년 타계할 때까지 대전 대흥동에 살고 있었다.
1997년 전북에서 한 여류 가야금 명인이 타계하자 국악계는 '예술성이 뛰어난 김종기류 산조가 완전히 끝났다'며 개탄했다. 최근 '전북제'라는 별칭까지 얻은, 기교가 뛰어난 이 유파의 명인은 김종기의 애제자였던 정금례(鄭今禮). 하지만 그녀는 정치인 아들에게 누가 될까봐 대전으로 건너와 김종기류를 보급시켰다. 김종기류가 전북대신 대전지역에서 꽃을 피운 것은 순전 정금례 명인의 공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대전에서 더 이상 뜻을 펴지 못한 채 말년에 고향 전북 오수로 내려가 몇몇 후학을 가르치다 쓸쓸히 세상을 떴다.
지난해 11월 황해도 무형문화재 제2호 '난봉가와 산염불' 보유자가 발표되자 국악계는 비로소 한 노명창의 소리가 전승될 계기가 마련됐다며 안도했다. 85세임에도 카랑카랑한 소리를 자랑하는 그 남성은 대전지역에서도 어느 정도 알려진 박기종(朴基鐘) 명창. 민형식, 산홍에 더해 전설적인 명창 이반도화에게 사사한 이력만으로도 국보(國寶)감인 그가 미련할 정도로 대전을 고집한 지 40여년만의 경사. 하지만 그는 대전이 아닌 황해도의 무형문화재로 지정됐다.
이들 세 명의 공통점을 보면 국악 분야에서 매우 독보적인 실력을 자랑하는 명인명창이라는 점과 대전출신은 아니지만 대전의 전통문화예술발전에 기여한 공로가 큼에도 수고한 만큼에 비해 허접한 대접을 받았다는 점이다. 그나마 박기종 명창은 대전지역 언론의 집중적인 조명을 받아 그 정도는 덜 했지만 김초향, 정금례 명인의 경우는 안타까울 정도로 홀대받은 것이 대전 문화예술계의 현실이다. 김초향은 드러내놓고 활동하지 않았다는 점, 정금례는 그의 제자들이 아직도 대전지역에서 많은 활동을 하고 있다는 점에서 반론의 여지는 있을 수 있다. 하지만 그들에 대해 지역사회가 얼마나 알려고 노력했냐고 반문해본다면 어떤 대답을 할 수 있을까?
이들 타지출신 예술인에 대한 대접이 소홀한 것이 소위 '뜨내기'들에 대한 경계심이 매우 강한 대전지역 토박이들의 기득권이 보이지 않게 작용했기 때문이라는 한 국악평론가의 얘기가 일견 설득력 있어 보인다. 이들 타지출신 예술인들을 충분히 수용하지 못한 결과가 전통예술분야의 불모지라는 오명으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다행히 연정국악원을 비롯한, 많은 국악 단체가 대전지역의 예술수준을 높이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지만, 일류도시 대전에 걸맞는 위상정립을 위해서는 특히 타지 예술가들에 대한 더많은 배려심과 포용이 필요하며 그를 통해 전통예술 분야의 우수성을 제고해야 할 것이다.
국가적 경제위기의 여파로 올해 전통예술분야 지원이 대폭 삭감됐다. 가뜩이나 배고픈 지역예술인들에게는 정말 슬픈 뉴스일 것이다. 그 와중에도 대전이란 고목에 아름다운 꽃을 피우기 위해 많은 타지의 예술인들이 들어와 오늘도 아름다운 소리를 부단히 만들어내고 있다. '향토성'이란 미명하에 이들 타지출신 예술인들의 뛰어난 예술이 사장되지 않기를 소망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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