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시 고등학교 2학년이었던 최우영(69·사진) 현 충남대 교수는 대전고등학교에서 수업을 받고 있었다. 그 때 집회 정보가 들통나 교장 사택에 연금됐던 학생 간부진들이 담을 넘어 탈출, 학교로 돌아왔다.
동시에 대전고 1~2학년 1000여 명이 '학생들의 감시를 중단하라' 등의 선언문을 낭독한 뒤 일제히 거리로 뛰어나왔다.
이것이 우리나라 민주화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고 있는 대전 3·8 민주의거의 첫 시작이었다.
최 교수는 “거리로 나온 학생들은 한밭 운동장 등 대전시내 일원에 스크럼을 짜고 행진했고, 경찰은 학생 대오 속을 백차로 밀어붙이고 칼빈 소총을 휘두르며 강제 해산시켰다”며 “당시 학생 간부 등이 무차별로 연행됐는데 그 숫자는 정확하지 않다”고 회고했다.
이튿날 경찰은 대전공고, 보문고, 대전상고 등 각 학교 간부 학생을 전날 시위에 연루됐을 것이란 추측으로 연행 조사를 벌였다.
10일엔 대전상고 1~2학년 600여 명이 또다시 거리로 뛰쳐나와 이 땅의 민주화 열망에 동참했다.
3·8 민주의거가 있었던 1960년 전후의 시대상황은 이승만 대통령 장기집권 야욕을 드러낸 사사오입(四死五入) 개헌, 대구매일 피습사건, 경향신문 폐간 사건, 야당 대통령 후보인 조병옥 박사의 선거운동을 막기 위한 총선일 변경 등이 잇따라 일어났다.
최 교수는 “이승만 대통령 취임 시 대한민국 주권은 국민에게 있다 '주권재민'(主權在民)을 역설했는데 현실은 민주주의가 아니었다. 이 때문에 학생들이 민주화된 정의로운 사회를 요구한 것이다”라며 3·8민주의거의 배경을 설명했다.
이어 “3·8 대전의거는 2·28 대구의거, 3·15 마산의거와 함께 모두 고등학생들에 의해 촉발된 민주화의 열망은 결국 4·19 혁명의 도화선이 돼 자유당 정권을 퇴진시키는 힘이 됐다”며 “지나고 보면 계획된 것이 아니고 민주화에 대한 국민 열망이 들불처럼 일어난 것이다”라고 해석했다. 그러면서 최 교수는 3·8 민주의거 발생 50년이 흐른 지금 현 시대를 살아가는 후손들이 이를 잘 알지 못한다며 아쉬움을 드러냈다.
최 교수는 “그동안 우리나라는 가난 탈출을 위해 살아왔고 현재에도 민주화는 더는 사회의 화두가 아니다”라며 “현재 교편을 지는 교사도 지난 30년 동안 민주화에 대해 배우지 못했으니 학생들에게 이에 대해 가르칠 수 있겠느냐”고 반문하며 “국가 발전과 사회 민주의식은 같이 가야한다”며 3·8 의거 의식의 계승을 강조했다.
또 타 시도 민주의거에 비해 저평가된 3·8 민주의거를 부각시키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최 교수는 “2·28 대구의거, 3·15 마산의거는 민주화 운동기념사업화법에 민주화운동으로 규정돼 있지만 대전의거는 그렇지 못하다”며 “충절의 고장 대전에서 촉발됐던 민주화의 씨앗인 3·8의거 또한 민주화운동으로 포함될 수 있도록 정치권과 지역민의 뜻을 모아야 한다”고 말했다. /강제일 기자 kangjei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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