넬슨 만델라는 남아공 첫 흑인대통령으로 선출된다. 하지만 오랜 흑백인종차별 정책으로 깊어진 인종 간 갈등과 증오는 사라지지 않는다. 만델라는 럭비 월드컵을 인종의 벽을 깨는 기회로 삼기로 하고, 럭비팀 ‘스프링복스’의 주장 피나르를 불러 꼭 우승해달라고 주문한다.
4분 9초. 온 나라가 숨을 죽였다. 김연아는 춤추는 요정처럼 우아하게 얼음판 위를 누볐다. 국민들은 행여 실수할까 조마조마 가슴 졸였고, 가슴이 떨려 애써 TV화면을 외면하는 이도 있었다. 두 손을 마주 쥐고 그녀의 우승을 간절히 기원했다. 드디어 터진 환호. 그 순간, 대한민국은 하나였다. 그녀가 웃을 때 국민들도 환하게 웃었고, 그녀가 눈물을 훔칠 때 울컥 가슴이 뜨거워졌다. 차별도 차이도 갈등도 이념도 없었다. 이게 스포츠의 힘, 스포츠가 주는 감동이다. 때론 인종의 벽도 깨부순다. ‘우리가 꿈꾸는 기적: 인빅터스’는 스포츠의 힘과 감동을 잔잔하면서도 밀도 있게 그려낸다.
“온 세상이 캄캄한 무덤처럼 나를 짓누르는 밤. 나는 어떤 신에게든 감사의 인사를 올린다. 내게 굴하지 않은 영혼을 준 것에 대해서. …그리고 오랜 재앙의 세월이 흘러도 나는 두려움에 떨지 않을 것이다. 문이 비좁다고 해도, 아무리 많은 고통과 어둠이 나를 기다릴 지라도. 나는 내 운명의 주인. 내 영혼의 선장.” 남아공 대통령 넬슨 만델라가 감옥에 갇혀 있을 때 애송했다는 시다. 영국 시인 윌리엄 어니스트 헨리가 20대 젊은 나이에 질병에 걸려 한쪽 다리를 절단하면서도 삶의 희망을 버리지 않을 것을 스스로 다짐하면서 쓴 시. 제목 ‘인빅투스(Invictus)’는 ‘굴복하지 않는’이라는 뜻을 가진 라틴어다.(영어식으로 읽으면 ‘인빅터스’가 된다)
영화에서 만델라는 이 시를 적어 럭비대표팀 주장인 프랑수아 피나르에게 건넨다. 만델라는 반세기 가까이 이어진 흑백갈등을 해소하기 위해 ‘백인 스포츠’인 럭비를 지원하는 승부수를 던진다. ‘인종차별의 상징인 럭비대표팀을 없애자’는 여론을 달래고, 스스로 팀의 정신적 지도자로 나서 월드컵 우승에 도전한다.
어제까지만 해도 서로의 목숨을 노리며 총구를 겨눴던 두 인종을 스포츠로 결속하겠다는 대통령의 발상은 곧 반발과 냉소에 부닥친다. 더욱이 흑인들의 절대적인 지지로 대통령이 된 사람이 흑인의 스포츠인 축구가 아니라, 백인의 전유물인 럭비를 택했으니…. 하지만 ‘상대방의 마음을 샅샅이 뒤져서라도 선의(善意)를 찾아내 파고드는’ 만델라의 전략은 최약체로 평가됐던 남아공 팀의 기적 같은 선전을 이끌어낸다. 원작은 영국 일간지 인디펜던트 기자인 존 칼린이 1989년부터 6년 동안 남아공 지국에서 근무하면서 겪은 실화를 토대로 쓴 책이다.
영화는 만델라가 스포츠를 정치적으로 이용했는지에 대해선 언급하지 않는다. 오로지 만델라의 진심이 주변을 어떻게 변화시키는 지에 집중한다. 만델라가 믿고 실천할 때 좀 더 나은 방향으로 진화하는 환경과 사람의 변화를 보여준다. 남아공 럭비 선수들은 경기 장면에서 정말 ‘죽어라’ 부딪히고 넘어지며 그들에게 1995년의 기적이 어떤 의미였는지 몸으로 웅변한다. 럭비 규칙을 모르는 관객도 가슴이 울컥 뜨거워지는 것을 참기 어렵다. 영화에서 주장 피나르는 동료들에게 말한다. “들려? 저건 6만 관중의 함성이 아냐. 4300만 국민이 외치는 소리야.”
올해 80세가 된 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이 모건 프리먼과 맷 데이먼의 믿음직스러운 이미지를 이용해 전하는 메시지는 간단하다. 우리는 어떤 지도자와 함께 살아가고 있고 살아가야 하며, 스스로의 삶에서 어떤 지도자가 될 것인가, 하는 것. 그리고 ‘관용의 정치’을 말한다. 배우들의 목소리로 전해지는 진심이 묵직하고 따뜻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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