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은허조례 제정 등 법·제도적 장치 마련
지하 깊은곳 유물 지상관람 가능한 동선 만들어
전망대·모식조성 파격 “원칙보단 문화이해 중요”
“한자의 모체가 되는 갑골문자가 은허에서 출토돼 세계를 깜짝 놀라게 한 것은 사실이지만 유물들이 모두 땅 속에 있기 때문에 은허유적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하기 위해서는 지하 유적을 어떻게 지상으로 끌어내 보여줄지가 가장 곤란한 문제였습니다.”
은허를 연구하는 중국학자들의 최대 고민은 땅 속 깊숙이 있는 토광묘에서 아무리 휘황찬란한 유물들이 쏟아져 나왔어도 이를 어떻게 만들고 사용했는지를 설명할 건물이나 도시가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1899년 국자감(國子監) 좨주(祭主·오늘날의 국립대 총장)이자 금석학자였던 왕의영(王懿榮)이 한약을 달여 먹기 위해 처방 받은 용골(龍骨)이라는 약재에 새겨진 글자를 확인함으로써 실체를 드러낸 갑골을 찾아 수많은 학자들이 중국을 뒤진 결과 하남성(河南省) 안양시(安陽市) 소둔촌(小屯村)이 출처임이 밝혀졌다.
▲ 중국인들은 은허 유적지구내에 전시관과 교육시설을 건립하고, 향당과 왕궁을 복원해관람 자 중심의 과감한 전시를 펼치고 있다. 사진은 교육장으로 쓰는 회랑. |
1928년부터 중국은 대대적인 소둔촌 발굴에 나서 사마천의 사기(史記)에 나온 은(상·BC 1600~BC 1046년) 말기(BC 1300년부터)의 도성 은허를 찾아냈으며 한자의 원형인 갑골문자를 확인할 수 있었다.
이 외에도 875㎏짜리 세계 최대 청동솥 '사모무정(司母戊鼎)'을 비롯해 갑골 15만 편, 청동기 5000여점, 옥기 2600여점이 출토되었고 은허의 궁전유적에서 120m 떨어진 농지에서 발굴한 부호(婦好)무덤에서는 청동기 468점, 옥기 755점, 골기 564점 등 1928점의 유물을 토해냈다.
그러나 이런 어마어마한 유물들이 쏟아져 나왔지만 이들은 모두 땅 속 12~15m에 있던 것들로 동서 약 6㎞, 남북 약 6㎞, 전체면적 36㎢의 꽤 넓은 은허유적지는 말 그대로 허허벌판이었다.
초석은 고사하고 땅 속에 박혔던 기둥 구멍자리들 뿐인 은허유적지를 중국인들은 어떻게 세계문화유산으로 만들어냈을까?
2001년 안양시가 정식으로 은허 세계유산 등재 신청을 위한 노력을 시작함으로써 '하남성 안양 은허 보호관리조례'란 법적·제도적 장치가 마련되고 은허관리처가 설립돼 본격 유적 정비와 보호관리업무에 들어갔다.
중국 국가문물국이 비준한 은허보호계획에 따라 중앙정부 지출금 3000만 위안(한화 약 50억 원), 안양시 부대경비 1억8900위안(한화 약 320억 원), 사회기부금 3100만 위안(한화 약 53억 원) 등 우리 돈 423억여 원이 투입돼 유적지구 복원 정비 및 전시시설 건립 등이 실시됐다.
▲ 중국인들은 왕릉구역에 수목을 이용한
모식(Duplication)을 통해 왕릉형태를 구별할 수 있게 했으며, 사진 속 빨간 사각형 집이 은허 전망대로 2006년 세계문화유산 등재 후 철거됐다. |
유적의 범위 지정과 보존관리 못지않게 중요한 부분이 홍보인데 중국 정부는 60세 이상 주민들을 대상으로 여러 가지 연극과 춤 모임을 결성해 상대(商代)의 이야기를 춤으로 구성하는가하면 무정왕의 부인이었던 여장군 부호의 일생을 그린 연극을 만들어 공연하고 복골로 점을 치는 모습을 재연하는 등 문화유산과 더불어 사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여줘 높은 평가를 받았다.
2001년 10월 은허유적의 세계문화유산 신청 준비를 시작해 2006년 7월 13일 유네스코에 이름을 올렸으니 만 5년이 채 안 걸린 초고속 등재지만 이 과정에서 중국에게도 나름대로 고민이 있었다.
은허유적 발굴조사를 한 탕지건 책임연구원은 “은허가 세계 고고학적 유산이라는 데 이견은 없지만 지하에 있는 유물들을 지상에서 볼 수 있도록 관람 동선을 만들어주는 것이 필요했다”고 회고했다.
중국 정부가 지하 유물을 보여주기 위해 선택한 방법은 대단히 적극적이고 관람자 중심이었다.
우선 사모무정 출토유구와 차마갱(車馬坑)유구 등 중요유구를 일반인들이 관람할 수 있도록 유적지 내에 전시관을 건립하고 이곳에서 출토된 복골, 청동기, 옥기류 등 주요유물들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또 상 왕조의 궁전건축을 보여주는 왕궁의 일부를 복원했으며 부호묘 바로 옆에 향당(享堂)을 세우고 유적지 전체를 조망할 수 있는 전망대를 유적지구내에 설치하는 과감함을 보였다.
세계유산 등재 당시 설치했던 전망대는 현재 철거되고 없었는데 그 이유를 묻자 중국사회과학원 고고연구소 안양분소 위에짠웨이(岳占偉)연구원은 “재질이 목재라서 위험하고 주변 경관과 어울리지 않는다는 의견이 제기되어 철거했다”고 설명했다.
유적지구내에 전시관과 교육시설, 향당, 왕궁 등 건물을 올리고 또 철거하는 행위 자체를 의아하게 생각하는 취재팀에게 탕지건 책임연구원은 “대중의 이해를 돕기 위해 건물 건립이 필요했으며 철저한 고증을 거쳐 짓는데 아무 문제가 없었다”고 자신 있게 이야기했다. 그는 또 굳이 유적지 내에 이런 시설물들을 지은데 대해 “다소 원칙에 맞지 않더라도 더 많은 사람들에게 현대층 아래에 고대 유적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필요했다”고 덧붙였다.
그는 또 “어떤 유산이 OUV를 인정받기 위해서는 진정성(Authenticity), 또는 완전성(Integrity)의 요건을 충분히 충족시켜야한다”면서 “이런 점에서 유적지 내에 왕궁을 복원하고 향당과 박물관을 짓는 행위는 유산의 진정성을 훼손하는 행위로 간주돼 결코 쉽지 않은 결정”이라고 말했다.
백제시대 사찰과 건물, 탑 등이 거의 소실돼 눈에 보이는 유물유적이 많지 않은 공주·부여 역사유적지구의 세계유산 등재를 준비하는 우리나라에서도 성곽과 고분, 사찰의 복원에 있어 늘 대두되는 문제가 '진정성'논란인데 이에 대한 중국의 해답은 의외로 간단했다.
탕지건 책임연구원은 “원칙에 맞지 않는 부분이 있더라도 더 많은 사람들에게 은허의 유물유적을 보여주기 위한 선택으로 전혀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라며 “다만 지하 고대유적이 없는 곳에 시설이 지어야하며 유적공간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지 않아야한다”고 덧붙였다.
중국의 이런 과감한 결단은 우리나라에서는 상상조차 어려운 일이라고 평가한 최 위원장은 “다른 나라에 없는 사례를 관람객의 이해를 돕는다는 원칙아래 유구 위를 유리로 덮어 보여주고 왕궁과 향당을 복원한 것은 대단한 발상의 전환”이라고 칭찬했다.
한편 왕릉구역 내 묘도 윤곽선에 측백나무를 심은 것을 보고 부여군문화재보존센터 이동주 책임연구원은 “평면상태의 왕릉구역에 수목을 이용한 모식(Duplication)을 통해 왕릉형태를 구별할 수 있게 했으며 갑골문에 사슴을 사냥하던 기록이 나오는 점을 들어 사슴을 방목함으로써 볼거리는 물론 잔디관리 기능까지 하고 있는 점이 독특하다”며 “발굴조사가 계속되고 있는 부여에서도 발굴조사가 완료된 구역에는 나무와 풀 등 자연친화적인 재료를 활용하여 백제유적의 흔적을 보여줄 수 있는 다양한 모식방법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 필요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중국 하남성=임연희 기자 lyh3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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