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영진 본보 前주필 |
파고다 공원 군중 앞에서 선언문을 낭독한 것은 청년 정재용이었다는 걸 아는 이는 많지 않다. 이날 오후 2시 중국집에서 선언문을 낭독한 대표들은 조촐하게 점심을 들며 총독부에 전화를 걸었다. 행사를 마치고 축배를 드는 중이라며 신고를 했다.
그렇게 해서 전원 체포를 당했다. 이날 장안에선 웃지 못 할 진풍경이 일어났다. 일본인 경기도지사가 퇴근길에 군중 속에 갇혀 군중의 강요에 〈조선독립만세〉를 불렀다는 이야기다. 이 만세 사건은 순식간에 전국 방방곡곡에 번져 총독부가 발칵 뒤집혔다.
유관순의 아우네 장터 만세사건도 그 연장이었다. 당시 만세운동에 참가한 연 인원은 202만명, 사망자 500여명, 부상자 1만5000여명, 민가 700동이 불타고 교회 47동 학교 두 곳이 문을 닫았다. 그러나 대표 33인 중에도 배신자가 생겼다.
‘최린’은 총독부 기관지(매일신보) 사장에 취임 일본의 ‘대동아공영권’ 패권주의 노선을 지원했다. 또 ‘조선임전보국단’ 단장과 ‘중추참의원’까지 지낸 바 있다. 그리고 박희도는 동광(잡지) 주관을 맡으며 곡필을 일삼았다. 2ㆍ8선언문을 기초한 이광수는 훗날 학병선동과 ‘내선일체’의 논리(?)를 폈다.
그리고 ‘한용운’과 최남선의 행적도 눈을 끌었다. 최남선은 독립선언문을 기초한 인물이지만 처음부터 태도가 석연치 않았다. 자신은 학자의 길을 갈 몸이라 조용히 살고 싶다며 서명을 꺼렸다. 이에 ‘한용운’이 펄쩍 뛰었다. 대표성이 없는 자가 어떻게 선언문을 기초하느냐며 자신이 쓰겠다고 나섰다.
그리고 최남선이 초한선언문의 나약성을 꼬집었다. 하지만 이미 초안이 완성된 뒤라서 한용운은 말미를 손질하는 선에서 매듭지었다는 것이다. 한용운은 시인으로 ‘님의 침묵’이라는 시와 소설 ‘흑풍’을 썼고 ‘불교유신론’을 남긴 큰 인물이었다.
서울의 3 · 1운동은 도쿄유학생의 2ㆍ8선언에서 자극을 받은 것이었다. 도쿄 학생선언문은 이광수가 초안한 것으로 문체가 강경했다. 목적이 달성될 때까지 영원히 혈전(血戰)을 벌인다는 선전포고였다. 그것은 제1차 세계대전 직후 ‘넬슨’ 미 대통령이 평화원칙 14조를 내놓은데다 ‘파리’ 강화회의에서 〈약소국의 발언권강화〉를 거론하던 시기였다.
그 물결이 다음해 도쿄유학생의 2ㆍ8선언으로 이어졌다. 서울의 3ㆍ1만세 사건 후 ‘타고르’는 〈아시아의 등촉〉이라는 시를 동아일보에 게재 눈을 끌었다. 이어 인도의 ‘간디’가 〈비폭력저항주의〉를 외치며 노동자의 선봉에 섰다.
〈영국에 대해 빵을 달라 했더니 그들은 돌멩이를 주었다〉고 외쳐댔다. 〈악에 대한 비협력은 선에 대한 협력과 공(共)이 인간 지상의 책무〉라고 절규한 ‘간디’였다. 서울의 만세 사건은 중국의 5ㆍ4 운동과 중동, 터키의 민족운동에 영향을 끼쳤다.
이제 우리 겨레의 초상은 어떤 것인가를 생각해 보는 계절이다. 필자는 80면대 한ㆍ일 의원연맹 도쿄대회 취재차 도일 당시 도쿄유학생들의 ‘아지트’였던 기독교 회관을 찾아간 일이 있다. 지금은 YMCA 호텔이라 부른다. 그 호텔엔 안춘생 독립기념관장이 묶고 있었다.
그는 육사교장을 지낸 광복군 출신으로 안중근 의사의 당질이기도 하다. 도쿄에 오면 그는 꼭 이 호텔에 묵는다고 했다. 그가 묵는 방엔 2ㆍ8선언문으로 단장한 병풍이 놓여 있다. 선언문 끝자락엔 백관수, 김도연, 이광수, 주요한 등의 이름이 적혀있었다.
기독교회관(호텔방)과 2ㆍ8선언문으로 장식한 병풍, 거기에 광복군 출신 안춘생 관장, 이는 잘 어울리는 한 폭의 그림이었다. 3ㆍ1절을 보내며 생각을 한다. 우리 모두는 역사와 민족이라는 거울 앞에 어울리는 자리에 있는가 하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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