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네 살 소녀 수지가 살해당했다. 아빠와 엄마 그리고 동생들은 갑작스런 그녀의 부재가 가져온 슬픔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수지를 떠올리는 건 그녀를 죽인 이웃집 남자도 마찬가지다. 천국으로 떠나지 못한 수지는 지상과 천상의 경계에 남아 가족과 살인범, 첫 키스의 남자를 지켜본다.
어린 동생을 살려낸 수지에게 할머니는 “넌 오래 살 거야”라고 말을 건넨다. 말을 건네자마자 내레이션이 흐른다. “할머니의 말은 틀렸다. 난 14살에 살해됐다. 1973년 12월6일이었다.”
‘러블리 본즈’는 짝사랑하던 남학생으로부터 처음 데이트 신청을 받고 날아갈 듯 들뜬 설렘으로 귀가하다 이웃집 남자에게 살해된 수지의 독백으로 막을 연다. 아, 이 영화 스릴러로군, 하고 짐작케 하는 대목이기도 하다. 범인을 추적하는 범죄스릴러. 맞다. 스릴러이긴 하다. 하지만 영화는 예상을 깨부수고 기존의 스릴러와는 전혀 다른 행보를 취한다.
영화의 시선은 죽은 뒤에도 미련 때문에 다음 세상으로 옮아가지 못하고 지상과 천상이 경계 지역에 머무는 수지의 시선이다. 수지는 딸의 갑작스런 부재로 고통 속에서 살아가는 가족, 살인범을 잡으려는 가족들의 분투, 수지의 동생을 대상으로 다른 범죄를 계획하는 연쇄살인마를 지켜본다. 그리고 떠나는 자와 남겨진 자를 연결하는 유대와, 상처를 딛고 다음 단계로 도약하는 치유와 고양의 순간을 지켜본다. ‘러블리 본즈’는 ‘예상치 못한 시련을 통해 점점 커지는 유대감’을 뜻한다.
볼거리는 단연 수지가 머무는 지상과 천상의 경계에 대한 묘사다. 물풀이 일렁이는 바다, 바다에 비치는 커다란 얼굴, 내려앉은 하늘, 원색의 둥근 공과 펭귄처럼 생긴 나무, 거대한 병과 그 속의 범선들…. 10대 소녀의 꿈속에서나 나올 법한, 어디서도 본 적 없는 것들을 그려낸 뛰어난 시각적 상상력은 보는 내내 감탄하게 만든다. 이 환상적인 비주얼들은 세상의 바깥을 떠도는 어린 영혼의 안타까움과 억울함, 분노와 미련이 복잡하게 교차하는 마음을 빼어나게 의역했다는 점에서 정서적으로나 논리적으로 상당히 효과적이다.
특히 아빠가 딸과 함께 만든 ‘유리병 속의 배’를 깨뜨릴 때, 수지의 눈앞에서는 유리병에 담긴 거대한 배들이 파도에 휩쓸리다 부서지는 광경이 연출되는 대목은, 현실과 판타지의 경계를 허무는 지극히 인상적인 장면이다.
그러나 이 아름다운 장면들이 결국 피터 잭슨 감독의 발목을 잡았다. 현실의 고통을 낭만적인 판타지 속으로 도피하는 것으로 너무 쉽게 끝내 버리는 게 아닌가 싶은 것이다. 판타지에 제작비와 러닝타임을 할애한 나머지 가족들의 황폐화돼가는 내면을 묘사하는 에피소드는 빈약해졌다. 가족들은 고통 속에서 울부짖지만 그 뼈저리게, 살점을 도려내는 아픔을 관객이 공감하기란 쉽지 않다.
피터 잭슨의 5년 만의 신작, 스티븐 스필버그 제작, 전 세계적으로 1400만부가 팔려나간 원작 소설이란 탄탄한 기반 위에 시얼샤 로넌, 레이첼 와이즈, 수전 서랜든, 스탠리 투치 등 배우들의 흠 잡을 데 없는 연기에도 불구하고 미국 현지 평단으로부터 후한 점수를 받지 못한 이유도 아마 거기에 있을 것 같다.
‘러블리 본즈’는 피터 잭슨의 전작들, ‘반지의 제왕’ ‘킹콩’ 등과 이어놓기에도 의외의 작품이다. 다소 낯간지럽고, 유머를 끌어들이기 어려울 뿐 아니라 규모도 작다. 물론 피터 잭슨은 역시 비애와 공포 사이를 다룬 걸작 ‘천상의 피조물’을 만들었었다. 이 영화의 소녀들도 수지와 똑같은 14살이었고, 소녀의 심리 묘사는 ‘러블리 본즈’에서 더 섬세해졌다. 그렇다 해도 천진난만하다 못해 섬뜩하기까지 했던 상상의 세계를 그린 ‘천상의 피조물’과 가족 간의 유대를 강조하는 ‘러블리 본즈’의 정서적 거리는 꽤 멀어 보인다. 피터 잭슨 팬들이 마냥 지지할 수 없었던 것도 무리가 아니다.
‘러블리 본즈’는 피터 잭슨의 실패작일까. 어쩌면 그럴 지도 모른다. 피터 잭슨은 자신이 보고 싶어 하는 것을 마음껏 그려냈지만 관객이 보고 싶어 하는 지점을 확보하는 데는 실패했다. 그러나 잊지 못할 정도로 슬픈 아름다움을, 혹은 아름다운 슬픔을 선명하게 빚어낸 솜씨는 ‘역시 피터 잭슨’이란 찬사를 들을 만하다. 이토록 아름답고 처연한 실패작이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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